"몇 건 했어요?"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실적'이다.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이 시작되면 가뭄에 콩 나듯 나누는 대화가 다 '실적' 이야기다. 전 국민의 관심거리였던 천안함 이야기조차 한 일이 없다. 우리는 기본급 90만 원에 만근수당 10만 원까지 100만 원을 받는다.
목표실적이 한 달 50건 계약인데, 이걸 못 올린다고 월급이 깎이는 것은 아니다. 목표실적 50건에서 10건을 더 올릴 때마다 10만 원이 추가된다. 그런데 우리 중에 영선 언니만 빼고 나머지는 다 기본 목표를 채우지 못한다. 당연히 수입이 100만 원이 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인센티브를 받으려면 한 달 20일 내내 하루 평균 3건 이상 계약을 따내야 한다. 영선 언니만 이걸 해낸다. 에이스인 그녀도 기복이 있는 편이다. 최상의 컨디션을 한 달 내내 유지하기란 힘들다.
"컨디션이란 게 날마다 좋은 게 아니잖아. 미치도록 안 되는 날도 많아." 30대 중반의 주승씨(가명)는 경력을 인정받아 '건 당' 월급을 받는다. 기본급은 적용하지 않고 IPTV 한 건 유치할 때마다 2만 원을 받는다. 고객이 IPTV 에 가입하면 약정 기간 3년 동안 회사가 벌어들이는 돈이 약 60만 원인데, TM에게 2만 원이 돌아가는 것이다.
"나 2주 동안 30만 원밖에 못 벌었다. 큰일이야."주승씨가 말했다. 자신이 있어 건당 보수를 받기로 한 건데, 생각대로 잘 안된다고 한다. 이 회사는 주승씨가 다니던 곳에 비해 고객 가입절차가 까다로운 편이다. 고지해야 할 정보도 많고, 지켜야 할 규칙도 많다. 실적압박에 시달리는 주승씨는 매일 점심으로 1000원짜리 김밥 두 줄을 먹었다. 열 살도 더 어린 철수에게 몇 만원씩 꿔 달라 아쉬운 소리도 했다. 며칠 뒤 그는 결국 그만뒀다.
입사를 위해 면접을 볼 때 실장은 "열심히만 하면 월 250만 원에서 300만 원은 갖고 갈 수 있다"고 했다. 내가 학원 강사 경력이 있어 잘 할테니, 성과급 많이 가져갈 수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현실은 달랐다.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 동안 나는 겨우 한 건의 실적을 올렸을 뿐이다. 그것마저 하루 뒤에 취소됐다.
초보가 인센티브를 받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열심히 해도 쉽게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한 달을 꽉 채워 일했다고 해도 50건 실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보험업계의 경우 월 300만 원에서 500만 원을 보장한다는 광고를 내면서 텔레마케터를 모집하는 경우도 있는데, 어지간한 관록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100~120만 원 벌기도 벅찬 게 현실이다. 주 5일 근무, 시간도 일정하고, 고된 육체노동도 아니지만 사무실 사람 모두 '오래 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솔직히 배울 게 없잖아."영선언니가 말했다. 회사가 집에서 가깝고 근무시간도 일정해서 양육비라도 벌어볼까 시작한 일이었지만, 수입이 적어 그만 둘 생각이라고 했다.
경기도의 한 전문대학을 휴학 중인 철수는 군 제대 후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호텔 도어맨, 지하철 외판원을 거쳐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은 친구 따라 골프장 캐디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감정 노동
영선 언니나 철수, 주승, 순미씨와 같은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얼마나 되는 걸까? 전화로 판촉을 하는 텔레마케팅 회사나 고객의 불만사항 등을 처리하는 콜센터는 199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에 등장하기 시작해서 90년 후반 이후 급속히 확산돼 왔다. 텔레마케팅 업체들을 대변하는 한국컨텍센터협회에 따르면 지식경제부에 신고한 업체만 3만5천 개에 이른다. 대략 60만~80만 명의 상담원이 종사하고 있고 매출규모는 11조 원으로 추산된다.
지난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놓은 <텔레마케터 인권상황 실태보고서>를 보면 신고를 하지 않고 영업하는 일시적인 텔레마케팅업체까지 합할 경우 대략 100만 명에 가까운 근로자가 텔레마케팅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현재 텔레마케팅을 포함한 콜센터 업체 중 금융·보험업이 47%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통신·유통서비스가 22%, 제조·도소매업·공공행정 등이 그 뒤를 잇는다.
텔레마케터라는 직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인다. 특히 여성의 경우 성별·학력· 결혼 등으로 진입 장벽이 높은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그나마 환영받는 몇 안 되는 직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콜센터 노동자 중 여성 비율이 90%가 넘는다. 근무시간이 일정하고 사무실에서 일하며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유인요소가 된다.
그러나 '상냥하고 친절한' 여성성을 이용해 이윤을 얻는 콜센터 산업에서 실제 근로자들은 엄청나게 고통스런 '감정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인권위 보고서를 보면 조사 대상 텔레마케터 74%가 "감정노동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답했다. 또한 응답자의 37%는 '언어를 통한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성희롱과 폭언은 노동자에게 큰 스트레스와 감정적 소진을 가져온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당사자의 삶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텔레마케터의 근무여건은 전반적으로 열악하다. 상여금을 포함해 세전 월 평균임금은 2007년 기준 134만2천원으로, 우리나라 전체 산업 평균(191만3000원)의 70%에 불과하다. 인권위의 면접조사 결과 3-4개월 근속이 일반적이라는 답변이 나올 정도로 이직률이 높다. 간접고용인 위탁파견과 특수고용 종사자까지 포함하면 텔레마케터 중 비정규직 비율은 90%에 육박한다. 이들 대부분은 노동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지난 2001년에 보험회사 텔레마케터를 중심으로 '전국텔레마케터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위탁계약을 한 특수고용형태지만 명백히 사용 종속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회사측은 이들이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보험설계사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노동부는 회사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노조설립 기도는 무산됐다.
콜센터는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종사자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한 개선 움직임은 별로 없다. 앞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인권위는 여성감정노동 대응방안을 제시했다. 감정노동 대응 매뉴얼을 구축하고, 텔레마케터들이 심리적 안정을 취할 휴게시설 등을 마련할 것, 휴식시간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할 것을 제시했다. 하지만 아무런 구속력이 없었다.
남녀고용평등법에 '고객 등에 의한 성희롱을 방지하기 위한 사업주의 예방 및 조치 의무'를 규정했지만 구체성도 없고 현실적인 구속력도 없었다. 인권위가 텔레마케터 실태조사를 한 지 2년이 지났지만 감정노동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된 것이 없고, 근로환경도 나아진 게 없다. 텔레마케터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없는 상태다.
유럽연합(EU)의 경우 지난 2004년 통신부문 노사가 콜센터 노사선언을 공식 발표했다. 콜센터 종사자의 건강과 안전, 노동시간과 작업 부하, 임금 및 부가급여, 훈련 등에 대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100만 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텔레마케터들도 저임금, 건강을 위협하는 작업 환경, 그리고 감정적 학대에 방치되지 않도록 사회적 관심과 대책이 절실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이 만든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 창간특집으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