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똑바로 마킹 안 할래!"
6월의 어느 날, 김 교사는 가히 폭발 직전의 모습이었다. 창문을 관통하는 뜨거운 햇살도, 칠판 지우개에서 근근이 퍼져 나오는 분필가루도 아니었다. 그를 짜증나게 만든 것은, OMR카드에 마킹을 무려 10번씩이나 잘못하여 계속해서 날 쳐다보고 있는 한 학생때문이었다. 얘도 슬슬 미안해지기 시작했는지, 이젠 날 보며 '배시시' 웃는다. 아, 이쁘다. 이런 미소공격에 넘어가면 안될 텐데. 하지만 강하게 나가야 한다. "너, 집중 안 하지?" 한 번 더 버럭 소리를 질러 준 후, 수정테이프를 들고가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었다. 그리고 들어오면서 생각했다. '이 시험만 끝나면 7교시 보충수업도 끝이구나! 올레!'
학력 향상의 회오리에 휩쓸린 학교
4학년들(그래, 난 4학년 교사다. 6학년이 아니란말이다!)에게 7교시 수업시행명령(?)이 떨어진 건 지난 5월말이었다. 보통 4학년은 5~6교시정도까지 수업이 있는데, 6월 중에 시행되는 도학력고사에 대비하여 하루에 한 시간씩 더 수업을 하라는 이야기였다. 4학년까지 이런 상황이니 6학년은 오죽할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밝힌 '2010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로 인한 초등학교 교육파행사례를 보면, 사실상의 변형된 '0교시' 수업을 하는 학교는 180여 곳, 7~8교시 보충수업을 하는 학교는 165곳이나 된다고 한다. 이정도 되니, 우스갯소리로 초6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고3자녀를 둔 학부모들보다 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각급 교육청에서 시행중인 여러 정책 또한 학교간 학력 경쟁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경남 모 교육청에선 학력 향상에 1억원의 장학금을 내걸었다가 거센 항의를 받고 있으며, 경북에서는 교사를 대상으로 한 '학력 마일리지 제도'가 시행중이다. 즉, 교과부의 '일제고사'라는 정책을 비롯한 학력 향상 정책이 각 지방 교육청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고, 이는 다시 각 학교 교장들간의 자존심 싸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결국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보충수업이 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되는 걸까? 아이들의 반응은 반반정도로 나뉜다. 박 아무개 학생은 "그래도 문제를 많이 풀면 시험 성적을 올리는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옆에서 이 얘기를 듣고 있던 윤 아무개 학생은 "나는 공부를 못 하는데 공부 더 한다고 성적이 올라가지 않는다"라고 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아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집에 좀 일찍 가고 싶어요. 학교 1시간 늦게 마치면 학원도 1시간 늦게 마쳐요."
"공부방 갔다가 집에 가면 밤 9시예요. 어른들은 저보고 만날 공부 안 하고 논다고만 하는데, 실제로는 놀 시간도 없어요"
쉬는 시간이 없는 초등학생들
기초·기본 교육에 대한 책무성을 강화하는 처음의 취지와는 달리, 지금의 학력 관련 정책은 지나치게 경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학력을 위해(정확히는 7월에 시행되는 일제고사 성적을 위해) 우리 학교 6학년들은 매달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고 있으며, 이에 우리와 전통적 라이벌 관계(?)인 옆 초등학교에선, '7월달 체육 수업 중지'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체육 교과에 대한 근시안적인 시선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쯤되면 '도대체 학력 때문에 이러는 게 맞나?'라는 의문점이 들지 않는가? 아니, 들어야 한다.
또한 위에서 잠깐 언급한 '학력 마일리지제' 등, 교사간·학교간 경쟁을 부추기는 정책들도 문제이다. 이 제도는 초등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약 1년여간 진행되는데, 물론 목적은 '기초·기본 교육에 대한 책무성 강화'이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기초·기본 학력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가?', '기초학습 부진 학생을 구제했는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는 어떤가(6학년 담임교사에 해당)?' 등의 기준에 의하여 교사에게 '마일리지'를 준다. 이렇게 해서 '학력 지도 유공자'로 선정된 '우수 교사'에겐 교육감 표창 및 10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을 주는 제도이다.
물론 학력은 중요하다. 그리고, '10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이 탐이 나서, 혹은 교육감 표창을 받게 됨으로써 얻는 점수가 탐이 나서 학력 향상에 애쓸 교사는 없다고 본다(잿밥에 눈이 멀어 학생들을 들볶는 교사는 없어야 한다). 기초부진학생 없는 교실, 누구나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이러한 경쟁사회를 나는 무조건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씁쓸할 뿐이다. 그리고 서글플 따름이다. 무엇을 위한 경쟁이고, 무엇을 위한 학력인가.
초등학생들로부터 '운동장'을 뺏어간 '학력사회'
문득, 작년 5학년 담임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5학년 2학기때였는데, 역시나 도학력고사를 대비하여 학교에서는 '0교시 수업'을 시행했었다. 11월 초부터 약 한 달간, 아침 8시 20분부터 9시까지, 교실에서는 지리한 문제풀이 수업이 계속되었다. 하아, 교사도 지치고 학생들도 지치는 시간이 계속되던 어느날, 부장님께 질문을 던졌다.
"부장님, 이거 0교시 꼭 해야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겠다. 교육청에서 돈 내려왔으니깐 하긴 해야겠는데 솔직히 이게 맞는 건지 아닌건지……."
"근데 이거 왜 하는 거예요? 갑자기? 6학년 했으니깐 5학년도 하는 건가?"
"아마 중학교 대상 학력평가에서 우리시 성적이 별로 안 좋았을 걸? 그래서 이러는 거지 싶다."
작년 여름방학, 우리 학교 6학년들은 다른 학년들보다 일주일 일찍 개학 아닌 개학을 했다. 난데없이 방학 중 보충수업을 시행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9월 한달간 0교시 수업을 했다. 짐작하다시피 '일제고사'라 불리는 시험 때문이었다. 시험점수로 줄을 세우는 것은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시·군 교육청, 그리고 각 단위학교들 또한 누군가에 의해 열심히 줄세워 지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별, 시·군 교육청 별 평가 결과가 어떻게 쓰여지는지는 관계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경쟁 때문에, 아이들은 아침 독서시간 30분을 잃었다. 아니, 빼앗겼다. 그러나 더 슬펐던 건, 고분고분히 0교시 수업을 듣던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경쟁과 학력중심의 사회에, 이 어린 영혼들은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슬펐던 지난 기억, 더 슬퍼질 우리의 미래
아이들은 운동장을 잃었다. 한창 신나게 뛰놀아야 할 시기인데 말이다. 아이들은 독서시간을 잃었다. 한창 열심히 책을 읽으며 책 속 주인공과 뛰어놀아야 할 시기인데 말이다. 그렇게 우리네 아이들은 하나 둘씩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다.
그 잃어버린 자리에 차라리 학력이 제대로나 들어왔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다들 알다시피 학력이라는 것이 그 학생에게 입력하는 족족 소화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긴 그래서 매일매일 꾸준히(?) 학력으로 압박을 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안타깝게도 잃는 것이 너무 많다. 각종 매스컴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청소년들의 비행 문제에 대한 원인을 여기에서 찾는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쌤, 꼭 7교시 수업 해야해요?"
7교시 수업 사실을 '통보'했던 6월 초, 아이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외쳤다. 그 모습이 내게 "쌤, 꼭 0교시 수업 해야해요?"라고 외치던 작년 아이들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하지만 내년엔 아이들이 과연 선생님께 이런 질문이나 할까? 작년에도 했으니 올해도 하는가보다, 라고 하진 않을까? 경쟁사회로 인해 충분히 서글픈 요즘, 앞으로 이 아이들이 만들어나갈 사회는 얼마나 더 큰 슬픔을 지닌 사회가 될지 걱정된다. 아, 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슬퍼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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