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이 주안상을 차려왔다.
"자, 이 술 한잔 받게"이성용이 호리병을 쥐었다.
"아냐, 내 술 한 잔 먼저 받게."배대승이 호리병을 빼앗으려 들었다.
"내 집에 온 손님인데 자네가 먼저 받아야지.""나야 여기서 허구 헌 날 마시지만 거기엔 없잖은가? 자네가 술 고팠을 테니 먼저 받게."배대승이 막걸리를 쳤다. 이어 호리병을 잡은 이성용이 배대승의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막걸리를 목구멍에 털어 넣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의욕이 넘치나 승산이 없다"분기 가지고 될 일이 아니잖은가?""그러게 말이야."이성용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쳐들어 가제, 한양으로..."이성용의 어깨가 처졌다.
"언제?""초하룻날."이들의 대화를 뒤꼍에서 엿듣고 있던 사나이가 숨소리를 죽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못 들었는가?""아니,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분명 무슨 소리가 났단 말이야.""도둑고양이 지나가는 소리겠지.""아냐, 사람 발자국 소리였어..."이성용이 동물적인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남들은 다 가도 언심이 아부지는 가지 마셔요."잠자코 듣고 있던 아낙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지나갔다.
"여보! 술이 다 떨어졌수. 더 내어 오구려."호리병을 거꾸로 잡은 이성용이 배대승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병을 받아 든 여인이 밖으로 나갔다.
산채꾼의 세를 회의적으로 보는 산 사람"승산이 있다고 보는 가?"침묵을 깨고 배대승이 입을 열었다.
"싹수가 노래.""왜?""오합지졸이야""화승총이 있잖은가?""장군 없는 산채꾼은 오합지중이야.""자네는 장군이 온다는 말을 믿는가?"배대승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믿으니까 산에 올라갔지.""자네가 똑똑한 줄 알았는데 헛 똑똑이었군. 장군은 자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안 올 사람일세.""그걸 자네가 어떻게 알어?""나도 처음에는 장군님이 온다는 소리를 믿었는데 이제는 믿고 싶지 않아졌네.""나두 동감이야."배대승은 확신에 찬 모습인 반면 이성용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장군은 죄인 신분으로 압송되고 있다"더구나 임장군이 포박당하여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문이 의주에 파다하다네.""정말?""그렇다니까. 그 소문도 헛소문일까? 생각했는데 참이라 믿고 싶어졌다네.""왜?""오실 장군님이라면 세자빈이 사사되기 전에 왔어야 할 것 아닌가?""으음!"이성용이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고민할 것 없네. 내려온 김에 관가에 가 고변하시게나.""끙!"이성용의 입 속에서 파열음이 튀어나왔다. 찾아 간다 해도 고변이라 이름 붙이기가 낯부끄럽다. 현감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성용과 현감 사이의 내밀한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배대승은 친구의 목숨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로 인식했다.
"용기가 없다면 내가 동행해줌세. 망설일 것 없네, 어여 일어나게.""관아에 원님도 안계실텐데..."이성용이 현감 퇴청시간을 빌미로 꽁무니를 뺐다.
"동헌에 안 계시는 게 대순가? 관사로 찾아가면 되지..."배대승이 팔을 끌었다. 마지못해 방문을 벗어난 이성용이 아내와 맞부딪혔다.
"탁배기를 더 내오라 해놓구 설라므네 어딜 가시는 겁네까?"평양 출신답게 평안도 사투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관가에 좀 다녀올 일이 있어 그러하니 넘 걱정하지 마시라요."배대승이 능청스럽게 평안도 사투리로 대꾸하며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