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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목요일(8일)에는 포럼에 참석하러 서울에 갔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삼겹살과 옛정을 안주로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연락이 끊겨 소식이 궁금했는데 무척 반가웠습니다.

불판에서 익어가는 삼겹살. 10년 만에 만난 친구와 나누는 술잔은 즐거웠지만, 풀기 어려운 숙제도 남긴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불판에서 익어가는 삼겹살. 10년 만에 만난 친구와 나누는 술잔은 즐거웠지만, 풀기 어려운 숙제도 남긴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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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의 첫 만남은 작은 가게를 개업해서 운영하던 71년이었는데요. 친구는 당시 사관학교 생도였고, 졸업 후 위관급, 영관급 장교를 거치면서 우정을 쌓아왔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 친구는 집에 올 때마다 가게에도 들렀고, 고민이 있으면 상의했으며, 진급 소식도 가장 먼저 전해줄 정도로 각별했습니다.

친구는 90년대 중반에 대령 진급을 했는데요. 그때도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하루는 전화를 받았더니 "나 대령으로 진급했어, 아무래도 불안해서 봉투를 마련하려고 전셋돈을 빼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봉투를 전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1천5백만 원 벌었다!"면서 저녁을 사겠으니 당장 광주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장 오라는 전화는 초대장이나 다름없었는데요. 곧장 달려가 저녁을 먹으면서 마음껏 축하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효심과 의협심이 강했던 친구는 건네지는 않았지만, 전셋집을 옮기면서까지 봉투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30여 년을 사귀다 보니까 어머니를 비롯한 형제들 안부를 물어볼 정도로 가까워졌는데요. 마침 대위로 복무하던 큰조카(형님 큰아들)가 결혼을 하게 되어 주례를 서기도 했습니다. 큰조카라면서 부탁하니까 흔쾌히 승낙하더군요.  

2-3년 후에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장군으로 진급해서 저는 물론 주변인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장군으로 진급하던 날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던 짧은 한마디는 지금도 귓전을 맴도는데요. 친구는 흥분된 목소리로 "야, 나 오늘 장군 됐다!"며 아내와 저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반갑고 고마운 친구 전화를 받고 시간을 내서 가겠다고 해놓고 차일피일 미뤘는데, 30년 넘게 해오던 사업이 부도나니까 누구를 만나거나 외출하는 것조차 싫어지더군요. 빚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이사하면서 친구와의 연락도 끊겼습니다.  

10년 만에 연결된 친구와의 전화    

부산에서 몇 년은 담배도 끊고 술도 한 달에 1-2회 마시면서 하루하루 수양하는 마음으로 칩거생활을 했습니다. 부산 지역에 사는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이사한 것을 알고 만나자고 전화를 해와도 나가지 않았으니까요.

등산, 산책, 독서, 글쓰기, 밥 해먹기, 장보기 등이 부산에서의 주요 일과였는데요. 객지생활이 몸에 익숙해지고, 50대 후반이 되니까 생각도 조금씩 바뀌더군요. '사람 마음은 열 번 변한다!'는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습니다. 

3년 전에는 고향으로 이사하기로 마음을 정하니까 그리운 사람들이 하나씩 생각나기 시작했는데요. 몇몇 동창에게 전화해서 그동안 호의를 외면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사과도 하고, 만나서 점심을 먹으며 그동안 못했던 정담도 나누었습니다.  

40년 지기여서 그런지 군복을 벗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친구도 생각났는데요. 고향으로 이사해서도 지금쯤은 할아버지가 되어 아내와 오붓하게 잘 지내고 있을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으나 마음으로만 그리워할 뿐이었습니다. 

보름쯤 됐을까요. 취재하러 시내에 나갔다가 친구가 다녔던 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을 우연히 만났는데요. 연락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적어주더군요. 반갑게 받았지만, 공백이 너무 길어서인지 막상 전화하려니까 망설여졌습니다.

며칠을 망설이다 전화했더니 깜짝 놀라며 지금 어디냐고 묻더군요. 집이라고 했더니, 몸이 불편한 누님이 고향에 살고 있어서 한 달에 1-2회 내려온다며 소주나 한잔하자는 친구 목소리에는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배어있었습니다. 

"김대중은 빨갱이야···."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의 텔레파시가 통해서인지 제가 서울에 올라가던 지난 8일 만났는데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처음 인연이 시작된 애틋한 사연과 안부를 묻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비우더군요.  

젊어서부터 의협심과 효심이 깊었던 친구는 8년 전 준장으로 예편하고 모 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 장군 출신들 모임인 '성우회'에도 가입했더군요. 딸 셋 중에 둘은 결혼했고, 남은 딸 하나와 97세 노모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결혼해서 이사를 스물여덟 번 다녔다고 하더군요. 친구가 청년장교 시절, 하나 있는 자식 학교에 보내겠다고 길거리와 시장바닥을 떠돌며 행상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홀어머니 얘기를 할 때마다 가슴이 짠했는데요. 현재 생활에 만족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사)행동하는 양심이 주최한 6·15남북 공동선언 10주년 토론회 초청장 표지사진.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같은 역사적인 사건도 반대하는 이들이 적잖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사)행동하는 양심이 주최한 6·15남북 공동선언 10주년 토론회 초청장 표지사진.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같은 역사적인 사건도 반대하는 이들이 적잖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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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는 1시간 남짓 이어졌는데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을 실감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가족 안부를 묻다가 시국 얘기까지 나왔는데요. 예상하지 못했던 친구 얘기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좌파 세력이 너무 힘을 쓰는 것 같아 큰일이야. 북한이 어떤 집단인 줄도 모르고 데모를 하면서 그쪽(북한)을 편들어 주느냐고.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걱정이라니까."  
"정책이든 사건 해결이든 대통령이나 정부가 처음부터 진실을 밝혀야 국민이 믿고, 나라가 조용할 텐데, 그렇지 못하니까 시끄러울 수밖에. 조금 시끄럽고 복잡한 것이 민주주의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무엇으로 소일하며 지내는지 명함을 주고받으며 묻고 대답하던 중 작년 8월에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고 지지하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니까 표정이 변하면서 말을 받더군요.  

"내가 아는데 김대중 대통령 그 사람은 빨갱이야, 빨갱이 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지. 그동안 해온 주장이나 경력에서 알 수 있거든. 언론에도 다 보도되었으니까···."
"김대중이 진짜 빨갱이였다면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 수상들이 친서를 보내고 죽이지 말라고 박정희 전두환에게 압력을 넣었겠는가. 조작된 유언비어를 믿다니 답답하네!"

제 명함을 받은 친구는 가장 싫어하는 신문이 <오마이뉴스>라는 말도 덧붙였는데요. 싫어하는 이유와 그렇다면 지금 어떤 신문을 구독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제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참았습니다. 

전두환이 사건을 조작해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미국이 구명운동에 나섰던 일은 세계가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훗날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느냐며, 국민의 정부 때 장군으로 진급한 사람이 대통령 사상을 그렇게 모를 수 있느냐고 해도 막무가내였는데요. 이어지는 얘기는 더욱 실망스럽고 놀라웠습니다.   

"자네도 잘 모르는 모양인데, 김대중 대통령 그 양반 얼마 전 재산이 12억인가 14억 있다고 신고했잖아. 그거 다 거짓이야 거짓. 최소한 십몇 조 정도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놓았으니까. 서울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말문이 막혔습니다. 정의감에 불타던 친구의 청년장교 시절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잠시 슬픔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허공을 바라보는데 "자자 우리 오랜만에 만나서 정치 얘기로 분위기를 흐리면 되겠는가. 그런 얘기하려고 만난 게 아니니까 그만 하세!"라며 소주잔을 권하더군요. 맞장구를 치면서 잔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술자리가 끝나고 아파트로 가서 친구 노모에게 큰절을 올린 뒤 용돈도 조금 드리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왔습니다. 그만 들어가라고 해도 시내버스정류장까지 배웅을 나오더군요. 심야버스에 오르니까 저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는데요. 친구 오판을 바로잡는 길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하면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그:#친구, #김대중,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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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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