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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과 자신을 함께 키우는 '생산자'적 운동을 해야 해. 비난하고 폼 재는 건 '소비자' 밖에 안 돼."
 "조직과 자신을 함께 키우는 '생산자'적 운동을 해야 해. 비난하고 폼 재는 건 '소비자' 밖에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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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강자' 비전향장기수, 그 말만 들어도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고귀한 삶이라고 칭송도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보통 사람인 내가 따르기엔 힘든 삶으로 치부한다. 그러고선 어느새 우리는 일상에 빠져 허우적댄다.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면서….

그런 우리들에게 징징대지 말라고 호통치는 이가 있다. 바로 경상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8년 동안 옥고를 치른 권낙기(65) 통일광장 대표다. "나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힘들어. 그래도 푸념하지는 않잖아"라고 말하는 권 대표로부터 '어쩔 수 없이'가 아닌 '영광스럽게' 힘든 삶을 받아 안는 비법을 전수받았다.

서울 인사동의 한 밥집, 40대 두 여성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름하여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의 상근자 면접. 한 때 통일광장에서 일했던 송영현(41)씨가 같은 대학 선배인 안경애(42)씨를 권 대표에게 소개하는 자리였다.

"언니가 자기는 '통일'이 소원이라고, 통일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영현씨가 소개하고 경애씨가 덧붙인다. "아이들도 좀 컸고, 돈도 버는데 대단한 건 못해도 자원봉사라도 하고 싶어서요." 학습지 교사인 경애 씨는 화요일 수업을 뺐다.

권 대표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신중하다. "우리 통일광장이 아직 경제적인 여력이 안 돼서 사람 쓰기가 힘들어. 자원봉사라도 한 번 오면 보람을 느끼게 해줘야 할 것 아냐." 그는 올해 동안은 다른 선생님들과 친해지는 걸 목표로 하고 화요일마다 술이나 마시자고 부담가지 않는 제안을 했다.

낮 1시부터 5시간여 동안 이어진 면접. 그 사이 막걸리 네 항아리가 동났다. 권 대표가 "중학생, 초등학생 아이들도 있고, 학습지 교사까지 하면서 1주일에 하루, 이틀이라도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거 대단한 거야. 이 척박한 땅에서, 나이 마흔 넘어서 말야."라고 경애씨를 두둔하니 오히려 소개자 영현씨가 울컥한다.

"선생님, 마흔 넘으니 진짜 먹고 살기 힘들어지더라고요. 저 7년 동안 공장에서 돈 벌었어요. 뼛골이 쑤시고 정말 힘들었어요. 근데 우리 남편 참 대단해요. 가정, 애들 신경 하나도 안 쓰고 자기 활동만 하더라고요. 돈 하나 못 받는 지역 노동조합 상근자 생활. 그거 보면서 차라리 불X 두 쪽 달고 태어나는 게 좋겠단 생각 들더라고요. 나중엔 제가 정말 이렇게는 못 살겠다, 운동하고 싶다고 했더니 남편이 돈 벌겠다고 하데요. 내 꿈도 활동, 내 소원도 통일이었는데 이게 뭔가…. 그런데 아직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노동운동 한다고 집에서 쫓겨난 적도 있는 영현씨가 눈물짓는다. 

"생활인으로, 또 생산자로 살아라"

"우리 혁명한다는 사람들은 멀리 보고 그냥 내 삶을 살아가면 돼. 계산할 게 없다니까."
 "우리 혁명한다는 사람들은 멀리 보고 그냥 내 삶을 살아가면 돼. 계산할 게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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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문제로 고민하는 활동가들에게 권 대표가 자주 하는 얘기가 있다. 사형 당하기 전 조직 책임자가 젊은 시절의 그에게 전한 이야기. '생활전선, 건강전선, 사상전선을 지켜라.'

"인간은 정치를 하든 운동을 하든 뭘 하든 구체적인 생활인이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애를 키우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생활인이지. 그때 배운 게 생활전선 속에서 월급 등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야 어렵고 힘든 투쟁 속에서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거였어. 이 토대가 안 되면 절대 오래 못가. 어떤 변명을 늘어놓든 결국은 부패된 생활전선으로 자신을 변신해 버리지."

그는 출소하자마자 민중탕제원을 만들었다. "그걸로 우리 다정이, 다인이 잘 키웠잖아."

권 대표는 운동은 상식을 지키는 것이라 했다. 2000년 통일광장을 세우면서 그는 선배 장기수 선생들에 함께 세 가지를 지키자고 당부했다. '시간을 엄수하자. 모범을 보이자. 연대단체 분담금 등 약속한 건 꼭 지키자.'

"우리가 후배들한테 보여줄 건 가르쳐서 알게 하기보다는 감동을 줘 느끼게 하는 거지. 우리가 하자는 건 대단한 게 아니야. 누구나 지켜야 하는 거지. 그런데 그게 대단하게 느껴지는 건 다들 그런 기본적인 걸 안 하고 있다는 말이잖아."

통일광장이 세워진 지 10년. 장기수 선생님들은 집회든 행사든 늦는 법이 없다. 연대단체 분담금 내는 날을 꼬박꼬박 지켜낸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 동안 줄곧 '상식'을 지켜온 장기수선생들이 '모범'으로 비치는 시대다.

자신에게 엄격한 권 대표가 한마디 보탠다.

"내가 기자회견 가서도 앞에 잘 안 나서. 옛날에 한 번 나서보니까 <통일뉴스>에도 나오더라고. 그러니까 아는 사람한테 전화가 와. ' <통일뉴스> 봤습니다. 열심히 살고 계시네요.' 하고. 기분 좋았어. 그러면서 권낙기가 잘 나가는가 싶고…. 허영이 생겨.  사치와는 또 다른 정치적 허영이지. 이래선 길게 못 간다. 그걸 깨닫고부터는 잘 안 나서지. 선생들한테도 '우리가 겸손해지자'고 말해.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겸손이 아니라 익은 벼가 고개 숙이듯 후배들한테 기회를 주고, 격려하자고."

권 대표는 생산자적 운동을 하자고 강조했다. 나이 먹었다고 이름 빛내는 자리 찾고, 조직이 한 걸 자기가 한 것인 양 폼 재는 유통업자적인 운동이나 콩이니 팥이니 간섭하고 비난이나 하는 소비자적인 운동도 경계하자고. 민주노총이든, 전농이든, 진보연대든 조직 속에서 함께 커가는 생산자적 운동을 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운동은 사랑처럼 계산없이

경애씨와 권 대표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두 사람이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난 사이가 맞나 싶다. 경애씨는 40대 아줌마의 걸걸한 입심을 발휘한다. "선생님, 잔머리가 좀 있으시네요." 권 대표의 입담도 만만치 않다. "잔머리를 알아보는 니도 잔머리가 있다."

대화 중 누구 아느냐는 소리가 나오니 바로 경애씨가 전화를 걸고, 권 대표는 전화를 받아 반갑게 통화한다. 몇 년 만에 한국에 와도 그를 꼭 찾는다는 이들이 있다. 이유가 뭘까. 그에게 사람을 끄는 비법이 있을까.

"사람들이 나보고 인덕이 있다고 그래. 그런데 그건 단순한 인덕이 아니야. 모든 사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어. 내가 베풀었기 때문에 오는 거야. 내가 그저 비전향 장기수여서 오는 게 아니라니까. 잘못된 시대, 잘못된 정치를 믿으면 안 돼. 우리는 사람을 믿어야 돼. 그런데 사람을 믿으면서 정치가가 하는 계산을 하면 안 돼. 사람은 딱 하지 말아야 할 게 한 가지 있어. 남녀 간 사랑과 운동은 계산하면 안 된다는 거야."

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우리 집 오면 쌀도 내놓고 다 내놓거든. 다른 사람들은 날 보고 헤프다고 해. 그런데 그게 1년이든, 2년이든 훗날 돌아와. 지금 두 딸한테 들어가는 학비만 한 달에 백만 원이 넘거든. 학비 대기 어렵지. 그런데 한 달에 한 두 번 씩 뜬금없이 전화가 와. '다정이, 다인이 잘 큽니까?' 하고. '그래, 우리 애들 벌써 고3, 고1이다. 니도 잘 사냐? 남한테 피해주지 말고 잘 살아라'고 하면 애들이 뜨끔해 해. 그러면서 애들한테 학용품 사주라고 십만 원, 이십만 원 보내기도 한다니까. 그 애들이 벌써 10년 전부터 알던 애들이야."

권 대표는 이 질문엔 별다른 답이 없다고 했다. '절대 사람을 무시하거나 괄시하거나 편 가르지 마라. 나 자신부터 열어놓고 사람을 대하라.'는 게다. "개도 밥 주는 주인은 안 물어. 하물며 인간인데, 내가 정말 따뜻하고 진심으로 다가가는데 누가 그걸 부정하겠어. 또 당장 답이 안 온다 하더라도 우리 혁명한다는 사람들은 멀리 보고 그냥 내 삶을 살아가면 돼. 계산할 게 없다니까."

'관맹상제(寬猛相制)'.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자성어다. 붓글씨로 유명한 이명제 선생이 "권 선생은 부드러움과 사나움을 서로 잘 어울리게 하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거다"면서 '관맹상제'를 써서 선물했단다. 여림도 없고, 감성, 따뜻함도 없이 강한 것은 부러진다. 반면 감성만 있고, 여려서 자기 개성, 강함이 없으면 그 역시 허물어진다. 그에게선 여림을 품은 강함이 느껴진다.

반려자와의 추억

"10대 아이들에게 또 주먹 쥐고 '조국통일' '노동해방' 외치는 세상을 물려주어야 하는가. 내 1차적 의무사항은 그런 세상을 물려주지 않는 거지. 나머지는 자식들이 알아서 하는 거고."
 "10대 아이들에게 또 주먹 쥐고 '조국통일' '노동해방' 외치는 세상을 물려주어야 하는가. 내 1차적 의무사항은 그런 세상을 물려주지 않는 거지. 나머지는 자식들이 알아서 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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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안주가 부부싸움 이야기로 넘어간다. 결혼생활 15년이 다 되도록 싸운 적이 없다는 경애씨 말에 영현씨와 권 대표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쳐다본다. "하루는 마누라랑 대판 싸우고 짐을 싸들고 나왔어. 결혼은 나보다 먼저 했는데 아직 애는 없는 후배집에 가서 장모님께 전화를 했지.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하고." 그가 말을 꺼내자 영현씨가 "저도 시어머니께 전화했었는데…."라면서 완전 공감의 반응을 보낸다.

권 대표의 부부싸움 결론은 이렇다. "후배한테 절대 마누라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했나 보더라고. 며칠 후에 전화가 왔어. '여보, 뭐하고 있어. 내일 모레가 다정이 돌잔치인데…'라고. 다른 말 같으면 '시끄럽다' 했을 텐데 다정이 돌이라니까 누그러들더라고. 그게 아버지 마음인가 봐. 집에 들어가면서 한마디 했지. '다른 집은 싸우면 부인이 나간다던데 우리집은 거꾸로 됐네'."

지난 6월19일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열사추모제, 이옥순 열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지난 6월19일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열사추모제, 이옥순 열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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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출소한 권 대표는 91년 3월 원풍모방 총무부장,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부위원장을 지낸 고 이옥순씨와 결혼했다. "우리 둘이 90년 9월 중순에 처음 만난 건 우연이야. 하지만 모든 우연성은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어. 권낙기가 살아온 삶, 이옥순이 살아가는 삶. 이 삶이 같기 때문에 그런 필연적 계기가 생긴 거야." 사물을 과학적으로 보는 그의 해석이다.

"속전속결했지. 해놓고 보니 내가 실수했는지 마누라가 실수했는지 모르겠네. 결혼할 땐 좋았지만 이제 나이 예순 다섯에 홀아비로 두 딸 키우려고 하니까 고민도 많고 걱정도 있잖아."

고 이옥순씨는 2001년 폐암으로 권 대표의 곁을 떠났다.

어려움, 시대와 함께하는 영광

그는 독자들한테 꼭 알려달라고 했다. "권낙기도 생활인으로 걱정도 있고, 어려움도 있다."는 사실을.

"이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내 삶이 더 보람차지. 옛말에 남의 중병은 내 고뿔보다 못하다고 했어. 자기 힘든 것에 매몰돼서 도피하려고 하지 마란 말이야. 요새는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노동 해방 얘기해도 감옥 안 가잖아. 우리 선배들이 그만큼 토양을 만들어놨는데 이제 와서 어렵고 힘들다?

그러면서 나는 이만큼 했는데 누가 따라 오지 않는다면서 남 탓하지. 자기 자신부터 보라니까. 내가 어떻게 살았나 하고. 문제는 내가 지금 어렵게 살고 있느냐 아니냐야. 내가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다면 스스로 영광스럽게 생각해야지. 왜? 우리 조국이 어렵고 힘들잖아. 분단된 조국. 우리 노동자, 농민이 어렵고 힘들잖아. 계급사회니까. 그러면 당연히 어렵고 힘들게 살아야지. 힘 안 들고 어렵지 않다? 그건 가진 자들, 반동들만 그래."

그가 다시 강조한다. "일부러 가난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야. 이 시대를 걱정하고, 내 후손들에게 어떤 삶을,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건전한 고민을 하란 거지. 권낙기도 아이들 키워야 하고, 어떨 땐 나가기 싫은 집회, 기자회견 나가야 하고. 나도 어렵고 힘들다니까."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그 많은 집회, 기자회견 다 다니시는 이유가 뭐예요?"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렵고 힘들게 살려고. 깨어 있게 살려고."

혁명보다 혁명된 세상을 주고픈 아버지

"새한테 '저 나무에 가서 앉아라' 하는 순간 그건 진정한 새가 아니야. 하물며 인간이 왜 두들겨 맞고 전향서를 써야 해? 여기서 항복하고 싶지 않다는 게 1차적인 저항의식이었지."
 "새한테 '저 나무에 가서 앉아라' 하는 순간 그건 진정한 새가 아니야. 하물며 인간이 왜 두들겨 맞고 전향서를 써야 해? 여기서 항복하고 싶지 않다는 게 1차적인 저항의식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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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현씨 남편과 두 아들이 영현씨를 데리러 왔다. 권 대표가 미리 전화를 해 놓았었다. 영현 씨, 경애씨를 보내고 권 대표에게 두 딸 이야기를 물었다. 딸들에게도 강함과 약함을 적절히 사용할까.

"나는 한다고 하는데 받는 사람은 그게 아니더군. 이게 나이차가 있는 아버지가 갖는 어려움이야. 내 나름대로 관맹을 하는데, 받아들이는 자식은 관(너그러움)을 오해하고, 맹(사나움)을 섭섭해 해. 이게 참 힘들어. 난 사람관계에는 자신 있거든. 그런데 내 자식에겐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올해 고1인 다인이는 춤을 잘 춘단다. 은평에서 '권다인' 하면 알아준다고. 친구가 유명한 소녀그룹에 들어갔는데, 그 전에 오디션 볼 때 다인이더러 같이 가자고 했단다. 그때 권 대표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라고 딱 잘랐단다. 지금도 다인이에게 상처로 남은 듯해  미안하다.  그래도 아빠를 생각하는 딸이다. "아빠는 딸 잘 둔 줄 알아. 내가 다른 애들처럼 집 나가면 어떻게 할래?" 다인이 말에 "나갈 거면 나가라. 다시 아빠 안 볼 거면…." 그랬더니 다인이 말이 걸작이다. "아빠가 제일 잘 하는 건 똥배짱 부리는 거더라"며 씩 웃더란다. "말로는 갸 못 이긴다니까."(웃음)

대안학교에 다니는 고3 다정인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대학에 안 가겠다는 걸 그가 설득했다. "어릴 때 공부는 시험점수를 잘 받자, 일류대학에 가자, 이게 아니야. 10대 땐 다양한 걸 배우고 섭렵해야 해. 그것이 정규교육의 장점이야. 반대로 대안학교의 단점이지. 다정인 산골에서 대안학교 애들하고만 있었어. 그렇게 순진해선 이 사회 나와서 못 살아.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해 봐야 한다, 대학은 가라, 관문은 거치자고 말했지. 이건 아버지로서 의무라고. 1학년까지만 다니다가 2학년 때 중퇴하든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어. 인생은 창창하다. 이번에 떨어지면 재수하면 된다. 검정고시 보는 사람 중엔 30대 40대 50대도 있다고 말했지."

학비 부담에도 불구하고 권 대표가 다정일 대안학교에 보냈던 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운동한다고 매일 밤늦게 들어가는 홀아비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가르칠 자신이 없었던 것.

다인이도 대안학교에 보낼 고민이 있었는데 초등학생이던 다인이가 거절했단다. "아빤, 참 뭘 몰라. 언니가 지방 내려가서 기숙사 생활하는데 나까지 기숙사 생활하면 할머니가 얼마나 적적하시겠어. 아빤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데. 아빠도 섭섭할 거야. 난 여기서 할머니랑 아빠 옆에 있어야겠어." 참 기특해 그 말을 존중해줬다고.

그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가 어리다고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단다. 두 아이들이 앞으로 운동을 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도 단호히 말했다. "통혁당에서 모든 혁명은 가정혁명부터 해야 한다고 했어. 그런데 나는 나이 어린 두 아이에게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진 않아. 인간은 소새끼, 돼지새끼 키우듯 억지로 잡아끌면 안 되니까. 아버지로서는 이 아이들이 운동권에 나서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지. 10대 아이들에게 또 주먹 쥐고 '조국통일' '노동해방' 외치는 세상을 물려주어야 하는가. 내 1차적 의무사항은 이것이지. 나머지는 자식들이 알아서 하는 거고. 단, 알아서 한다고 해서 방목은 안 해. 잘 받쳐줘야 하는 거지. 사람은 끌고 가려고 하면 가고 싶다가도 안 가. 모든 인간은 주인이니까."

그는 사람들이 너무 삭막하고 경직돼 버렸다고 걱정했다. "사람은 뼈가 있고 살이 있어. 가장 중요한 건 혈관을 통하는 피야. 따뜻한 피. 바로 이 피, 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감동을 느끼고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

이어 "다른 사람들한텐 감동은 아니겠지만"하며 아이들과 얽힌 한 일화를 소개한다. "마누라 염할 때, 이제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이들이 훌쩍훌쩍 울면서도 자기가 우는 게 잘못되었나 싶어서 아버지 눈치를 봐. 아버지가 '왜 울어, 시끄러워' 할까봐. 나도 눈물을 흘리니까 그제야 아이들도 편하게 울어. 서로 끌어안으면서 꺽꺽 울었지. 그때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교육했기에 제 슬픔도 마음대로 울지 못하나 싶었어."

누구나 과오는 있다, 그러나 바뀐다

이거 인터뷰가 거꾸로 됐다. 인적사항을 깜박해서 물었다. "선생님 1946년도에 태어나신 것 맞죠? 4남 중 장남이시라고요?" 권 대표의 뜨뜻미지근한 답변. "난 취조받는 것 같아서 이런 거 싫어한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큰 아버지. 일제 때 비행기 조종사보다 빵빵하던 목탄차를 끌면서 큰 아버지의 군자금을 대고 심부름을 하다가 해방 후 노동운동을 했던 아버지. 고등학생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소년수가 됐던,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구교도소에서 3개월 가까운 단식투쟁 후 병보석으로 대구 동산병원 시체실로 나올 정도로 몸이 상했던 작은 아버지. 그 작은 아버지가 북에 올라갔다 내려와 터졌던 경상도 통일혁명당 사건 등 아직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한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그 이야기들이 궁금해 "선생님, 자서전 안 쓰세요?" 물으니 권 대표가 "용기가 안 나 못 쓴다."고 대답한다. "자서전 쓰면 다들 지 자랑만 하지 않냐. 만약 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내 자신을 내보여야 한다고 생각해. 60~70년 살아오다 보면 실수도, 과오도 있었을 텐데 그런 걸 다 내보일 자신이 없어. 통혁당 들어가 감옥 가고, 감옥에서 투쟁하고 감옥 나와서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해. 하지만 그 전 17~20살 어린 나이에 신문팔이도 하고, 구두닦이 하고, 인쇄공장에도 다니던 시절 얘기는 아직 못하겠어. 누군가는 권 선생님이 노동계급 밑바닥에서부터 단련됐다 추켜세우겠지만 그 어린시절에 부정적인 게 분명히 있었거든." 당시 그는 한나라당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공화당 청년회 회장을 했었다. 지인들은 우스갯소리로 권 대표가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 한나라당에서 한 자리 하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인간은 진짜 바뀌어. 한 인간이 이런 우여곡절과 부정성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잘 이겨냈나 이것이 진솔한 얘기지. 활짝 핀 꽃만 보여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그 꽃이 피기까지 벌레 먹기도 하고, 비바람 칠 때 가지가 꺾이기도 하지. 가뭄 때 시들기도 하고, 좀 잘된다 싶으면 진드기가 붙어서 보기 싫게 되기도 하잖아. 그걸 극복해 가을에 열매 맺고, 활짝 꽃 피우지. 그 다음에 다시 시들어 땅에 지잖아. 다시 봄에 새싹 나고. 우리 인간도 자연 모든 생명체처럼 10대, 20대, 30대, 40대 그렇게 커 가는 게 아닌가 싶어."

고통의 가치는 나를 알게 하는 것

비전향 장기수이기에 사상전향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권 가진 자들은 왜 그리도 고문을 하면서 전향을 시키려고 했을까. "들보를 치면 기둥이 운다는 말이 있어. 부르주아 사회에서 지배계급들은 직접적으로 노리는 수확물이 있는가 하면 간접적으로 얻으려는 수확물이 있어. 남쪽에 국가보안법이 있는 이유가 뭐냐. 전 국민을 우매한 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지. 국보법이 있으려면 거기에 적용되는 범죄자가 있어야 하잖아. 지금도 자꾸 간첩을 만들려는 것처럼. 간첩, 국보법 위반자를 왜 만드느냐. 그게 있음으로 해서 국보법이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는 거야. 너 까불면, 너 엉뚱한 짓거리 하면 이렇게 잡혀간다, 무의식 속에 족쇄 역할을 하는 거지."

그는 26살에 감옥에 들어갔다가 44살에 나왔다. 우문. 왜 그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전향을 하지 않았을까. "우선 전향을 한다고 하면 지금보다 다른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감옥에 들어올 때보다 더 좋은 세상이 되질 않을 것 같은 거야. 둘째는 어린 나이에 반항의식이 깔려 있었지. 사람이 길을 가도 빨리 가는 사람, 늦게 가는 사람,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있어. 날아다니는 새도 무수한 나뭇가지들 중 자기가 앉고 싶은 나뭇가지는 따로 있지. 새한테 '저 나무에 가서 앉아라' 하는 순간 그건 진정한 새가 아니야. 하물며 인간이 왜 두들겨 맞고 전향서를 써야 해? 내가 웃으면서 그랬어. 차라리 이 자식들이 날 두들겨 패지 않았으면 혹시 썼을지도 모른다고. 내 저항의식, 여기서 항복하고 싶지 않다는 게 1차적인 생각이었지."

그 어린 시절을 거쳐 감옥에서의 7년, 10년이 흐르자 그는 사회정치성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때는 고문을 하든 안 하든 죽어도 전향서를 안 쓰게 됐다고. 그건 1+1=2를 알기 위해 1, 2, 3… 숫자들을 배우고, 방정식을 하기 전에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배우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그는 설명했다.

"지금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향하지 않고 있을 때, 다시 말해 힘들고 어려울 때 고통받고 있을 때 내가 누구인가 스스로 인식되더라고. 그러면서 내가 점점 커가는 거야. 키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품성이든 정치성이든. 어른이 돼가는 걸 스스로 느끼게 된 거지."

그는 덧붙여 말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스럽다고 할 때가 있잖아. 내가 나한테 '낙기야 너 참 대단하다. 기특하다'면서 나 자신이 가장 사랑스러울 때가 바로 모진 고문, 그 어려운 시련을 뚫고 나와 이겼을 때, 버텨나갔을 때야. 독방 안에서 미소 지으면서 '내가 살아있다, 살아갈 만하다, 행복하다' 생각했어. 내 스스로 존재가치를 깨달은 거지. 불구덩이 같은 가시밭 속에서 찔리고 피투성이가 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깃발 같은 불꽃을 봤을 때, 아, 자기가 드러나고 기특해진다니까." 권 대표는 요새는 "낙기가 기특하다는 게 보이지 않는다"면서 "낙기, 야가 버려버렸다니까"라고 자조했다.

권 대표는 하루종일 집회, 기자회견, 강연, 사람만남 등을 다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들어갈 때가 제일 힘들다고 했다. 아흔이 다 돼 가는 어머니와 딸아이가 잠들어있을 집. 그리고 살아 있기만 했다면 병수발을 들더라도 그저 좋았을 아내가 생각나는 집이다.

"마누라가 있어서 바가지를 긁어줬으면 참 좋겠어. 어떤 애들이 힘들고 어렵다고 투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든 여자든, 그 옆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잖아. '둘'이라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행복으로 알라고 해." 그러면서도 걱정되는지 한마디 덧붙인다. "힘든 애들 다 나한테 오라고 해. 술이나 마시게."

앞이 보이지 않아 흔들릴 때, "두 눈으로 보면 현실이 보이고, 신념으로 보면 미래가 보인다"고 말하는 권 대표를 찾아가자. 12시간 술자리에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그가 한평생 투쟁의 길에서 연마한 자기 삶을 즐기는 비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취재 뒤이야기] 고문조작으로 산업스파이가 됐던 재일교포 가족 이야기


본래 아는 사람 인터뷰가 더 어렵다.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른 척 묻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필요한 걸 묻지 않기도 찜찜하다. 바로 이번 인터뷰 대상이 기자가 청년통일광장 회원이던 10여 년 전부터 인연 맺어온 '아는 사람'. 게다가 인터뷰 잘 안 하기로 소문난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다.

미리 인터뷰를 요청하러 간 자리에서 박정숙씨를 만났다. 권 대표는 자신은 식상한 사람이라면서 그를 취재하라고 했다. 박씨는 재일교포 산업스파이 조작사건으로 고통 받은 이헌치(57) 씨의 부인이다. 재일교포로 1979년에 S전자에 입사했던 이씨는 1981년 10월9일 만삭이었던 아내와 함께 보안사령부에 연행됐다.

재일공작지도원의 지시로 72년에 밀입북했다가 교육을 받고 국내 기업에 취업해서 동료를 포섭하고 국가기밀과 군사기밀을 탐지, 보고했다는 혐의였다. 1심에서 사형, 2심과 3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996년 8.15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돼 일본으로 돌아갔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97년에 이 사건이 고문, 구타 등에 의한 가혹행위로 조작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보안사에서 태어났던 성오가 벌써 서른 살이에요. 아빠가 떳떳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죠."

성오씨는 우리도 알고 있단다.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포스터에 담긴 아빠에게 안겨 있는 엄마와 아이 그림이 바로 열 살 때 성오씨가 그린 거라고. 아빠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진 엄마가 하루종일 일터에 나가 있던 시간에 그림을 그린 성오씨. 열 살이 되도록 한 번 본 적 없고, 안겨보지도 못한 아빠에 대해 말은 안 했지만 아이 마음 속엔 그림처럼 엄마, 아빠와 껴안고 싶은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다. 그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헌치씨 가족은 3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어 했다.

박씨는 친정어머니가 아파서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고 했다.

"선생님은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하면서 만났는데 몇 년에 한번 들어올 때마다 꼭 연락드리죠."

아주 세 보이지만 또 그만큼 부드러움도 갖고 있어 사람들은 그를 찾는다. 결국 그 부드러움이 이번 인터뷰 성사에도 한몫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7월호에도 실렸습니다. 다 전하지 못한 취재 뒷이야기들은 노동세상 홈페이지(www.laborworld.co.kr)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태그:#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이옥순, #노동세상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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