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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내 고향 시골에 가면 엄마의 인생, 삶에 대해 자주 여쭙게 됩니다.

작년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엄마의 삶'에 무관심했던 반성에서 시작된 작은 버릇입니다. 그때부터 엄마조차 잊고 사시던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엄마의 삶을 온전히 재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엄마가 12살에 겪으셨던 한국전쟁 이야기를 들었고 며칠 전에는 시골집 거실(마루가 적당할 것 같다) 탁상에 뒤로 서 있는 우리 삼형제의 사진의 배경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40여 년째 시골집에 걸려 있는 사진에는 아버지, 어머니는 안 계십니다. 늘 사연이 궁금해 알고 싶었는데 매번 무엇이 바쁜지, 잊고 오고 잊고 와서 궁금증이 더했던 사진입니다. 그 사진은 빛바랜 나무액자 속에서 한 해 한 해 더욱 빛을 잃어 가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우리 삼형제의 우애를 끈끈하게 잇는 질긴 끈처럼 느껴집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엄마는 그때를 제가 네 살 정도로 기억하십니다. 지금부터 41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읍내 사진관에서 사람이 마을을 돌며 사진 촬영권을 팔았다고 합니다.

어렵게 촬영권을 구입하신 엄마는 농사일 때문에 낮에는 읍내에 나가실 수 가 없어 해가 저물 때까지 일을 하신 뒤 서둘러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 삼형제를 끌고 사진관에 가셨다고 합니다. 당시에 6남매의 맏며느리인 엄마는 시동생과 시누이들 눈치를 보시느라 더하셨다고 합니다.

큰형과 작은 형은 걷게 하고 막내인 나를 등에 업고 그 먼 길을 가셨다고 합니다. 시골집에서 읍내까지는 십리길. 당시에는 버스며, 택시도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서울로 전학와서 시골집에 갈 때도 고등학교 때까지 막차가 일곱 시쯤 끊겼던 흙길이었습니다. 막차를 놓쳐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걸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길입니다. 물론 지금은 차로 10분도 걸리지 않는 짧고 예쁜 길로 변했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미리 손수 짜놓은 모자를 챙겨서 그렇게 그 길을 사모자가 달래며, 보채며 걸었다고 합니다.

왜 아버지에게 같이 가자고 안하셨냐고 여쭈었더니 엄마는 당시 아버지들은 그렇게 자상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으로 대신하셨습니다. 사진은 왜 같이 찍지 않으셨냐고 했더니 삼형제 찍어 주려고 갔는데 왜 엄마가 끼냐고 질색을 하셨습니다.

사진에 엄마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진에는 엄마의 깊은 사랑과 헌신이 함께 살아 숨 쉽니다. 같이 찍었으면 젊은 시절 엄마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엄마는 늘 좋은 것은 사양하시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때 막내가 40대 중반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두 딸의 아빠입니다. 아빠로서 엄마가 저와 형들에게 베푼 사랑은 흉내 낼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아무리해도 그 깊이를 따를 수 가 없습니다. '신은 모는 곳에 존재할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을 부인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어린 세아들을 데리고 십리길을 걸어 사진관을 찾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마치 '평생 우애'를 가훈처럼 여기라는 깊은 뜻을 담은 듯....
▲ 모성 담긴 삼형제 사진 어머니는 어린 세아들을 데리고 십리길을 걸어 사진관을 찾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마치 '평생 우애'를 가훈처럼 여기라는 깊은 뜻을 담은 듯....
ⓒ 최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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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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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주는 기쁨과 감동을 쓰고 함께 공유하고 싶어 가입했습니다. 삶에서 겪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그냥 스치는 사소한 삶에도 얼마다 깊고 따뜻한 의미가 있는지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그래서 사는 이야기와 특히 교육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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