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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범일지>를 작년에서야 처음 읽었다. 어려서부터 듣던 김구 선생의 인생 역정을 그린 그 유명한 책을 반백이 넘은 이제야 읽은 것이다. 백범 선생이 조국을 떠나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목숨마저 던질 것을 결심하고, 자신의 행적을 두 아들에게 남기기 위해 유서로 쓴 것이 <백범일지> 상권이다. 그리고 이봉창·윤봉길 의사 의거 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것이 하권이다. 이 책 구석구석에는 백범 선생의 나라사랑·겨레사랑 이야기가 진솔하게 배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것이 치하포 사건이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라고 불리는, 조선의 국모가 일본 낭인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된 뒤였다. 이 사실에 비분강개하고 있던 청년 백범 김창수(백범 선생이 18세에 동학을 믿으며 고친 이름)는 치하포에서 변장한 왜군 장교를 만나 그를 때려죽이고, 관헌이 잡으러 올 때까지 고향집에서 기다린다. 인천감영에 끌려가 취조를 받을 때 김창수는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친다. 이 일로 국사범이 된 김창수는 사형의 문턱에서 인천감영을 탈옥하였고, 서울을 거쳐 삼남지방을 돌아다니다 공주 마곡사에서 중이 된다.

치하포 사건을 일으키고 당당히 잡히다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에 따르면 치하포 사건은 다음과 같다. 청년 백범 김창수는 21세 되는 1896년 3월 평안도 용강군에서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치하포로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다. 치하포에 도착하여 여관에 들어갔는데, 한복을 입고 조선인 행세를 하였지만,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이는 등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 분명 변장한 왜놈으로 보였다. 백범은

"혹시 저자가 우리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가 아닐까? -중략- 내가 저놈 한 명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치욕을 씻어 보리라."

고 결심하고 왜놈을 처단할 방법을 찾았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백범은 다음과 같이 사건을 결행하였다.

"나는 크게 호령하며 그 왜놈을 발길로 차서 거의 한 길이나 되는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바로 쫓아 내려가서 놈의 목을 힘껏 밟았다. - 중략 -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간단하게 한마디로 선언했다. '누구든지 이 왜놈을 위해 내게 달려드는 자는 모두 죽이고 말리라.' 선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금 내 발에 채이고 밟혔던 왜놈이 새벽 달빛에 칼 빛을 번쩍이며 달려들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칼을 피하면서 발길로 왜놈의 옆구리를 차서 거꾸러뜨리고 칼 잡은 손목을 힘껏 밟으니 칼이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백범이 살해한 일본인은 이름이 '쓰치다'로 육군중위였다. 사건 후 백범은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라고 밝히고,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라는 포고문을 써 길거리 벽에 붙였다. 그리고 동장인 여관 주인에게 "안악 군수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라.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피신하라는 부모님과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하며 피신하지 않았다.

심문을 받으며 고관 관리와 일본에게 일침을 가하다

사건 두 달 만에 체포되어 해주옥에서 '일본사람을 살해하고 도적질을 했느냐?'는 심문에 '그런 일 없소'로 일관하여 고문을 받는다. 그 해 7월에 외국인과 관련된 사건을 재판하는 특별재판소가 있는 인천감리서로 이송된다.

인천감리서에서 심문을 받게 되자, 김창수는 비로소 "나는 그날 그곳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 명을 때려죽인 사실이 있소"라 말하며, 신문과정을 감시하고 있던 일본인 와타나베에게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호령한다.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이,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엇, 갈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아울러 심문을 하는 조선 고관 관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다.

"나는 일개 시골의 천민이지만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수치를 당하고, 푸른 하늘 밝은 해 아래 내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명을 죽였소. 그러나 나는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하였단 말을 듣지 못하였소. 지금 당신들은 국상을 당하여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고 있는데, 춘추대의에 나랏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소복을 아니 한다는 구절도 읽어 보지 못했소? 어찌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시오."

백범의 나라사랑 마음을 알리고자 떠난다

나는 자전거 여행가이다. 그것도 단순한 관광을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역사 주제를 갖고 떠나는 자전거 여행을 즐긴다. '타아완 한 바퀴', '베트남의 남북종단' 모두 그러한 역사의식을 갖고 시작한 여행이다.

세계에는 유명한 길이 많다. 그 중 나는 베트남의 호치민 통로, 남미의 체 게바라가 오토바이 여행을 한 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중국의 마오쩌뚱이 국민당을 피해 떠난 길,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일본군을 피해 다닌 길을 조사하고 있던 중, 우리나라에도 그런 길이 있음을 <백범일지>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백범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방되는 그 날까지, 우여곡절을 모두 극복하고 지켜낸 역사의 산 증인이신 분이다. 우리나라 우익 애국지사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좌익 애국지사는 아직 충분히 연구하지 않아 부득이 우익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친일·반민족 세력의 하수인인 안두희의 총탄에 서거하실 때까지 민족의 분열을 막고, 오직 민족의 통일만을 추구하시던 분이다.

그러한 애국지사가 청년시절 결행한 치하포 사건을 모든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명확하게 알리는 것이 그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청년 백범 김창수가 도피하여 다니며 사람을 만나서 힘을 얻고 스스로를 단련하였던 이 길을, 참다운 애국심을 갖게 하는 국토순례의 길로 만들고 싶다.

백범이 다녔던 길을 단순 추정해보니 약 1470km 정도이다. 자전거로 가면 약 보름이면 갈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자전거로 돌아보고 그 기록을 남겨 많은 사람들에게 백범의 행적을 알리고, 특히 젊은이들이 이 길을 다녀보게 하고 싶다. 이러한 개인적인 희망을 소속하고 있는 단체에 알렸더니 뜻있는 일이라며 기꺼이 후원에 나서 주었다.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 엄청나고 슬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애국애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도 버젓이 과거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 후손까지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과거 애국의 길로 들어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은 처참하게, 이름도 없이 감옥이나 광야에서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이 알려졌다 하여도 가문은 폐가가 되었고, 후손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사회의 하류층이 되고 말았다.

아직도 친일파의 후손들은 이 나라의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으며, 그 조상들이 그랬듯이 이제는 친미파로 변신하여(지금도 반민족 세력이 되어) 그 권세를 계속 유지하고 나라를 욕보이고 있다.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방 후에 친일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고, 지금은 친미파가 된 그들에 의해(지금도 그들은)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들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부끄러웠던 과거를 모두 파묻거나 아니면 왜곡하여 생긴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역사 바로보기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도 역사는 계속 왜곡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청년 백범 김창수의 젊은 시절 애국심에 불타는 모습을 현재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그 정신을 이어주는 것이 백범이 원했던 '완전 자주 독립국가'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 생각하며 길을 떠난다.

7월 14일 출발하여 2주 후인 27일 일정을 모두 마칠 예정이며 주요 경유지는 다음과 같다.

인천 감리서 터  - 서울 양화진 나루터 - 과천 - 오산 - 아산 현충사 - 공주 계룡면 - 강경 - 금산 칠백의총 - 무주 - 남원 - 임실 - 전주 - 금구 - 김제 - 광주 역말 - 무안 - 목포 - 해남 관동마을 - 완도 - 고금도 - 보성 - 화순 - 동북 - 담양 - 순창 - 하동 쌍계사 - 대전 현충원 - 공주 마곡사

덧붙이는 글 | 이 순례에 임시정부사적지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청년백범 등이 후원하였다.



태그:#청년 백범, #국토순례, #김창수, #도피여정, #삼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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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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