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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날 머뭇대던 마음이 마침내 '가자!'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길 위에 섰습니다. 이번엔 국내일주입니다. 언제나처럼 길이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을 믿으며, 길이 들려준 얘기를 편지로 전하겠습니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소소한 재미가, 작지만 변함없는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기자 주)

 산복도로 진입로. 삼복더위에 산복도로를 탄다는 것은...
산복도로 진입로. 삼복더위에 산복도로를 탄다는 것은... ⓒ 이명주
간밤, 비가 올 거란 일기예보와 함께 달무리가 짙어 걱정을 했습니다. 또 비가 와서 발이 묶이면 영 난감할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별 재주 없는 마음에 가끔 선견지명이 있습니다.

배낭을 챙기는 건 이제 어렵지 않습니다. 필요한 물건들을 목록으로 작성해 성질이나 사용 빈도를 고려해 차곡차곡 가방 안부터 채우면 됩니다. 문제는 출발 후부터인데, 이렇게 푹푹 찌고 변덕어린 여름날 긴 여정을 계획해본 건 처음이거든요. 더군다나 자전거를 타고 가방 안에 노트북과 카메라 같은 물건들을 잔뜩 넣고 말이지요.

원래 첫 목적지는 김해 봉화였습니다. 같이 살면 의지도 되고 배울 것도 많을 듯 했던 어른이 야속하게 세상을 버리고 나서, 이제야 그곳을 찾을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정의 시작이 그곳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초복이라던 아침 뉴스는 귀로 흘릴 게 아니었고, 봉화가는 길은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습니다.  

오전 9시가 좀 안 돼 집을 나섰습니다. 배낭 무게도 적절하고 새로 산 접이식 자전거도 몸에 잘 맞았습니다. 무엇보다 비가 오지 않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고작 20여 분쯤 지나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반 접은 자전거에 짐판에 실었던 짐까지 들고 말 그대로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지하철역 안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버스편을 확인했는데 지인의 조언(엉터리로 판명된)으로 마음을 바꾼 탓이었습니다.   

역무실에 도움을 청했는데 역무원들 역시 긴가민가하며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급한 성격 탓에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자전거가 접이식이라도 시내버스엔 태울 수가 없다는 사실었습니다. 기사가 아예 차를 세워놓고 시청에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럴 때는 맘을 비우는 게 최선입니다.

가격보다 더 착한 책방 주인들

 보수동 책골목 책방 할머니.
보수동 책골목 책방 할머니. ⓒ 이명주
자전거를 펼치고 보무당당하게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초반엔 꽤 재미가 있었습니다. 중앙동에서부턴 제법 이색적인 건물과 골목길 풍경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부산근대박물관 건물이 일제강점기 경제수탈 기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였던 것도 확인하고, 너무 오래 전에 와서 기억에서 지워진 용두산 공원도 다시 봤습니다. 다채로운 서민 삶이 맛깔나게 버무려진 국제시장 골목도 들여다 봤지요.   

가장 매력적인 곳은 보수동 책골목이었습니다. 대로변에 선 마을 간판에 '책은 살아야 한다'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방향을 돌려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색바랜 누런 책들이 벽돌처럼 쌓인 서점들이 보였습니다. 그 중 한 가게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샀습니다. 어릴 적 집 책꽂이를 한가득 채웠던 문학전집에 분명 있던 작품이었으나 최근에야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가격은 2천 원. 그러나 가격보다 더 착한 건 책방 주인들이었습니다. 책 제목을 말하면 "저 집에 있을 거다" 안내를 해주고, 사진을 한 장 찍자 하면 "저 할머니가 더 예쁘다" 점잖게 사양했습니다. '예쁜 할머니'께 "책은 저기서 사고 사진은 여기서 찍어 죄송합니다" 했더니 "아무데서나 사면 어때, 책 읽는 게 좋은 거지" 하시더군요. 기본 20년씩 이웃사촌으로 살았으니 이제는 가족이나 진배 없겠지요. 인심과 더불어 길이길이 보존되면 좋을 곳입니다.  

배가 고프니 '짜증 게이지' 급상승

책골목을 나왔을 때 갓 정오를 넘겼습니다. 체력 소모가 서늘할 때와는 판이했습니다. 그래서 한여름 이동시엔 미리 휴식을 취하고 꾸준히 물을 섭취하는 게 중요합니다. 배가 고프니 '짜증 게이지'가 급격하게 올라 밥부터 먹었습니다.

구덕터널 근처 가게 이름이 '왕돈갓'이었는데, '왕'이란 말은 좀 무색한 그냥 돈가스였습니다. 하지만 에어컨 대신 여러 대의 선풍기로 효율적인 냉방을 하고, 더할 나위 없는 주인의 친절을 감안하면 별 3개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식사는 끝났지만 햇빛을 피해 1시간쯤 더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사이 주인이 와서 근처 산복도로를 보고 가라 조언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오늘밤 거처를 좌우하게 됐습니다. 산복도로는 60년 전 전국의 피난민이 모여 조성된 산동네로, 옹기종기 붙어 앉은 색색깔의 집들과 산 아래 펼쳐진 부산항이 절경을 이룬 곳입니다.

혹자는 그리스의 산토리니에 이곳을 비유하던데 텔레비전서 보고 한번쯤 와보고 싶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김해로 가는 가야로를 코앞에 두고 자전거를 돌렸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려움 같은 건 없었습니다.

묘하게 겹친 KBS 시청료거부운동

 산복도로 풍경
산복도로 풍경 ⓒ 이명주

나무그늘 아래 홀로 앉아 아흔 둘이라 했다 여덟이라 했다, 고향이 경남이라 했다 충북이라 했다 하는 할머니와 잠시 쉬고 민주광장이란 곳에 도착했습니다. 얼마 전 일본 나가사키의 원폭자료관를 봤는데 한국에, 그것도 내 고향 부산에 이런 성지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규모도 규모거니와 4·19와 6월항쟁, 부마항쟁 등 처절했던 민주화 과정을 담은 박물관의 자료들이 방대하고 생생했습니다.

그 중에 특히 눈에 띈 것은 '상업광고·편파보도, 'KBS TV의 시청료를 낼 수 없습니다'라고 적힌 스티커였습니다. 그 아래 설명에는 'KBS 시청료거부운동 스티커'라는 이름과 함께 '1986년 공영방송 KBS의 상업광고와 편파보도에 대한 항거로 전두환 정권에 저항했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권 아래 KBS의 시청료 인상과 '블랙리스트' 논란이 한창인 지금 이런 스티커를 보게 된 것이 희한하고도 씁쓸했습니다. 위로가 된 한 가지는 이곳서 우연히 '임진왜란을 반성하는 일본인들의 모임' 일행과 마주친 것이었습니다. 길 위의 만남은 이렇듯 뜻하지 않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묘하게 겹친 'KBS 시청료 수신 거부 운동'
묘하게 겹친 'KBS 시청료 수신 거부 운동' ⓒ 이명주

다음번에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면 좋겠다 생각하며 민주공원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산복도로 투어에 돌입했습니다. 곳곳에 벽화와 거리 조형물들이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이 삼복더위에 산복도로를 탄다는 것은, 정말이지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어딘가쯤에서 정수리가 아플 만큼 뜨거워져 빈집 안으로 피신도 했습니다. 결단을 내려야했습니다. 결국 내리막길을 택해 한참을 내려와 부산진역에 도착했고, 또다시 힘겹게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아침보다 훨씬 꼬질꼬질한 몰골로 타인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은 구포역 앞의 '역전 여인숙' 2층의 한 방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 두엇 누우면 꽉 찰 만한 크기에 TV와 선풍기(다행히 창문도), 이부자리가 전부입니다. 이 집주인 아저씨는 봉화를 세 번이나 다녀오셨다 했습니다.

"훌륭한 분이셨어요. 똑똑하셨고…"

간다 못 간다 말 많았던 구포대교를 지척에 두고 일단 이곳에 여장을 풀었는데 구포 지하철역과 마주한 기차역에 갔더니 누군가 무궁화호를 타고 진영으로 가면 된다는 해답을 줬습니다.

내일 오전 7시3분 차로 갈 예정입니다. 계획과는 다른 첫날 여정이지만 벌써부터 마음이 울렁울렁하네요. 길이 이제 막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듯 해서 말이죠. 그럼 오늘은 이만 잠자리에 들겠습니다. 내일 또 편지하겠습니다.

 민주공원 전망대로 보이는 충혼탑. 부산에 가면 꼭 한번 들러보시길.
민주공원 전망대로 보이는 충혼탑. 부산에 가면 꼭 한번 들러보시길. ⓒ 이명주


#국내일주#우리동네 #자전거여행 #여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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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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