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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은 어떤 곳인가? 서울의 1.5배 되는 땅 넓이, 그러나 인구는 4분의 1 수준의 300만명. 일 년 내내 서늘하고 열흘 정도만 민소매를 입는 곳. 통독 20년이 지났는데도 대규모 국제공항이 하나 없는 곳. 스피커 소음도 없고 현란한 내온 간판도 없는 곳. 10분 동안 식사하기 위해 식당에서 1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곳. 개들을 위한 천국이자 자전거족들의 천국. 바로 그곳이 베를린이다. 우리와는 다른 여유와 느림이 있는 곳이다.

 

또 있다. 집값도 저렴할 뿐 아니라 임대료도 5년 동안 올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도 되는 곳. 형편이 안 좋다면 그냥도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곳. 윗 집, 아랫집 또 이웃집 사람들과 서로서로 안부와 형편을 묻고 염려해 주는 곳. 대학등록금을 비롯해 사회적인 보장이 확실한 곳. 대학등록금 천만원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우리, 그러고서도 고학력 실업자들이 넘쳐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곳이다. 배우고자 하는 이들의 천국이 바로 그곳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세계적인 화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베를린으로 몰려드는 이유 말이다. 조이한이 쓴〈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조이한 저, 현암사 펴냄)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곳이 집값도 싸고, 물가도 싸고, 무엇보다도 작업실로 쓸 수 있는 아틀리에가 싼 이유로 세계적인 젊은 화가들이 그곳에 몰려든단다. 특별히 분단시절 동독에 속해 있던 빈 건물들이 그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고 하니, 설득력이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유학하던 것을 바탕으로 베를린 곳곳의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들, 그리고 베를린 곳곳의 미술관과 예술가들을 위한 정책들을 소개해 준다. 뭐랄까? 책의 절반은 베를린 곳곳을 훑어볼 수 있는 여행서적의 느낌을, 그리고 나머지는 그 나름의 시각으로 각종 미술관과 그 전시작품을 읽어주고 있으니 또 다른 큐레이터와 같은 인상을 준다. 여행도 하고 문화적인 감각도 키울 수 있으니,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예술인에게 장학금 주는 베를린...'결핍'없이도 진정한 작품 나올까?

 

1992년부터 2005년까지 근 30년 동안 살았던 그는 그때 당시의 독일과 현재의 독일이 달라진 게 없지 않지만 사람들의 몸에 배어 있는 여유과 느긋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각종 상점들이 퇴근시간에 맞춰 칼처럼 문을 닫았지만 지금은 밤늦게까지 문을 연 곳도 많다고 한다. 수업료가 없던 그 당시의 대학시절과 달라진 게 있다면 우리 돈 30만 원에 달하는 돈을 등록금으로 낼 뿐 여전히 그곳은 배우는 이들의 천국이란다.

 

책 후반부에는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페르가몬 박물관'을 비롯하여,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회화 박물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고전주의풍의 '구 국립 미술관', 기차 역을 개조해 만든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 미술관', 그리고 '케테 콜비츠 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들과 그 속의 작품들을 엿보게 한다.

 

"그녀는 공장 단지 같은 커다란 빌딩의 한 층에 아틀리에를 갖고 있다. 350제곱미터의 작업장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몇 명의 조수가 150호 정도 되는 커다란 크기의 캔버스에 여러 색깔의 한지를 조각내 붙이고 있다. 아틀리에의 크기와 분위기는 그녀가 '한국에서 온 신데렐라'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한 작가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261쪽)

 

이는 베를린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화가 서수경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그가 말하는 서수경은 세계적인 미술 시장에서 상위를 점유한 스승을 통해 작품을 전시하는 이점을 누렸고, 그 기반으로 그녀의 작품이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고, 곳곳에서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수경은 그만큼 스승과 작품 전시회장를 잘 활용한 케이스이고, 그 이후 그녀의 명성에 걸맞게 더욱더 노력하고 애쓰는 정열적인 화가로 거듭났다고 한다.

 

그녀가 독일 사회에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사회의 예술가에 대한 지원과 정책이 큰 몫을 차지했음도 빼놓지 않는다. 베를린에서는 예술가를 위한 각종 장학금이 있고, 예술 저변의 확대를 위한 안정적인 시스템도 갖춰져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구청 단위의 전시장도 있고, 소규모 갤러리에도 인턴사원에 해당하는 임금지원책이 마련돼 있고, 지역도서관도 무료로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열어 놓는다고 한다.

 

그런데 조이한은 이 책 끝머리에서 그같은 좋은 정책과 지원이 꼭 위대한 예술가를 배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유인 즉, 진정한 작품은 결핍의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이란다. 베를린이 집값도 싸고, 생활비도 저렴하고, 다양한 예술행사와 각종 장학금이 풍부하고, 예술가를 위한 사회보장제도에다 안정된 미술시장이 갖춰져 있어서 예술가들이 몰려드는 최적의 장소이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진정한 예술혼을 꽃피우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만약 사회가 썩을수록 훌륭한 예술이 나오는 게 사실이라면 베를린은 오히려 그다지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술가의 소망과는 달리 아무런 장애가 없는 곳에서는 예술혼도 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314쪽)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케테 콜비츠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투쟁의 역사가 그녀의 심성에 들어 차 있었던 까닭이고, 고흐도 먹고 사는 궁핍함 속에서 위대한 작품을 드러내 보였듯이, 진정한 예술혼은 육체의 빈궁함과 더불어 무언가의 결핍 속에서 창작되는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볼 때 외부적인 환경의 넉넉함 때문에 독일 베를린으로 몰려드는 젊은 예술가들의 예술혼이 진정으로 살아나 꽃피우게 될지는 앞으로 지켜볼 부분인 듯 하다. 진정한 예술혼의 가치는 지금 당장의 세대가 아니라 후 세대를 통해 평가되기 때문이다.


베를린, 젊은 예술가들의 천국 - 베를린의 미술과 미술 환경에 관한 에세이

조이한 글.사진, 현암사(2010)


태그:#예술혼, #독일 베를린, #케테 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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