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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혁명을 말한다>에서 자신의 삶의 행적을  이야기하고 있다.
▲ 강연중인 오세철 전 연세대 교수 <다시 혁명을 말한다>에서 자신의 삶의 행적을 이야기하고 있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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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늦은 7시 태복빌딩 2층 강당서 열린 작은책 정기 강좌의 강사는 오세철 전 연세대 명예교수였다. 백발이지만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것이나 눈빛의 혁혁함이 70을 앞둔 나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를 배후 조종,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고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으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를 대한 첫 느낌이다.

강연의 제목은 '다시 혁명을 말한다'였다. 그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진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했다. 사회주의, 사민주의, 공산주의 등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혀주지 못한다는 것이 그이가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고 싶어하는 이유다. 1967년 27세 최연소 대학교수가 되어 대학 강단에 선 지 44년 만에  명예퇴직을 한 뒤에도 그이는 여전히 강의를 통해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 이를 진보적 실천가며 사회주의자라고 평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기가 진짜 마르크스주의자로 산 것은 1987년 이후 23년간이라고 못 박는다.

대학민주화운동을 위해 대학교수 평의회를 만들고, 민중 후보인 백기완씨의 선대본부장을 맡는 등 많은 활동을 해 온 그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운동은 노동자의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그들과 연대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1972년부터 75년까지 마르크시즘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돌아온 그이는 이론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두 번의 계기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첫 번째는 유신 말기인 76년 수업하는 현장에 유리창을 깨고 들어 온 3명의 제자들을 통해서이다. 삼엄한 독재체제하에서 당당히 자신들의 소신을 드러낸 그들의 모습에서 강단에선 이론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돌아서게 됐다. 그러나 그이의 활동은 소그룹 토론회나 동아리 활동 등 상아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현장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실천가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그이를 온전히 현장에 눈 돌리게 만든 사건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었다. 자신에게 조직 행동학을 듣던 제자 이한열의 죽음은 그이를 상아탑을 벗어나 현장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실천가로 바꿔놓았다. 2004년 그이는 파리 제 8대학과 같은 사회과학대학원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할 꿈을 지니고 연세대학교를 명예 퇴직했다. 교수 100명이 천만 원씩 출자해 종자돈 10억을 만들어 2005년에 사회과학대학원을 세우려던 그의 꿈은 여건상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이는 노동자와 연대한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발걸음을 내딛은 순간이라고 자평한다.

오세철 교수는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는 중이다. 죄목이 국가보안법 위반이기에 그이는 승리를 확신한다. 그이가 위원장으로 있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은 남북한 양쪽 체제의 모순을 모두 비판할 뿐 아니라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이적단체나 이적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실제로 서울중앙지법은 2009년 '국가의 존립과 안전, 자유 민주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며 두 번이나 영장을 기각했다. 그이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공개 강의에서 자기 정체성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드러내놓고 말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이적 행위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더 이상 자본론이나 마르크스의 사상을 검열하는 사회가 아니기에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서 이적단체나 이적표현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전적인 삶의 행적을 통해 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 다시 혁명을 말한다. 자전적인 삶의 행적을 통해 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 빛나는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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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는  2009년 <다시, 혁명을 말한다>(빛나는 전망)라는 책을 냈다. 책에서 그이는 자신을 둘러싼 가정 배경이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자기는 왜 자본가들을 위한 경영전략을 강의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삶이 공평해지기를 바라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살 수밖에 없었는가 등 개인적 삶을 풀어 놓았다.

이화여대 교수였던 어머니, 연세대  영문과 교수였던  아버지는 와세다 대학에서 만났으며 사회주의에 눈뜬 진보적인 사람들이었다. 오 교수가  월북했거나 피난 도중 사망했을 것이라고 여겼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월북한 것이 아니라 9.28 수복 당시 국군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이모의 유언을 전해 들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부모의 삶이 그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데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했다면 제자 이한열의 죽음은 그를 현장의 실천가로 이끌어내는 실질적 동인이 되었다. 그것이 그이를 뼛속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 살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라디오 21 코리아 포커스에도 보냈습니다.



다시, 혁명을 말한다

오세철 지음, 빛나는전망(2009)


태그:#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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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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