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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ㄱ. 어머니 손글씨 '신문 돌리기 표'

어머니는 늘 여러 가지 부업을 하셨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들 또한 언제나 여러 가지 부업을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부업을 하시면 곁에서 어머니 부업을 거들거나 심부름을 합니다. 부업은 늘 끊이지 않기에 우산을 꿰매든 털옷을 짜든 하루 내내 쉴 틈 없이 돌아갑니다. 어린 나날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 부업을 거드는 일은 그날 일기장에 '오늘은 어머니가 하는 일을 많이 거들었다' 하는 이야기를 적는 한편, '오늘 하루 내 생활태도'에 '△'나 '×'가 아닌 '○'를 넣을 수 있어 무척 보람이 있는 하루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일기장 한켠에 동그라미이든 세모든 그려 넣어야 하는 '오늘 하루 내 생활태도'란 으레 아무렇게나 넣기 일쑤였지만, 어머니 부업을 거든 날만큼은 '난 착한 어린이예요' 하고 스스럼없이 동그라미를 넣었습니다.

어머니 부업을 거들다 보면 밖에 나가서 놀 수 없습니다. 동무들이 창문 밖에서 "종규야 놀자!" 하고 불러도 대꾸를 할 수 없습니다. 제가 퍽 오랫동안 일을 거들었으면 "얼른 나가서 놀아라." 하시지만, 이제 막 일을 거들었다면, 어머니는 모르는 척합니다. 또는 "좀더 거들고 이따가 놀아." 하십니다.

어찌 되든 어머니가 나가서 놀라고 할 때까지는 좀이 쑤시고 괴로워도 꾹 참습니다. 우산 꿰매기를 할 때에는 밖에서 놀고 들어온 다음에 해야 할 일거리가 있거나, 다 꿰맨 우산을 부업집에 갖다 주는 심부름을 하면 되니 씽 하고 나가서 놀곤 합니다. 그렇지만 털옷 바느질 부업을 하실 때에는 제 두 손은 털실을 감는 연장이 되어야 하니 꼼짝을 못합니다. 제가 어머니 부업을 많이 거들지 않고 밖에 나가서 오래 놀고 들어오면 우리 형은 "엄마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넌 밖에 나가서 노냐?" 하면서 꾸지람과 주먹이 날아들었습니다. 그래도 밖에 나가 놀고픈 마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형한테서 꾸지람을 듣고 주먹다짐을 받더라도 동무들이 부를 때에는 나가 놀고 보자는 마음이곤 했습니다.

우산 꿰매는 부업을 하실 때에는 어머니랑 부업집에 함께 가서 꿰맬 거리를 잔뜩 안고 돌아옵니다. 우산 살하고 우산 천 들을 안고 오는데, 우산 대하고 우산 살하고 맞추고 맨 위 꼬챙이 쪽에 조그맣고 동그란 조각을 끼운 다음 우산 천을 꼬챙이 쪽부터 꽂고 우산 무늬에 맞추어 하나하나 실로 꿰맵니다. 이때 우산대 꼬챙이 안쪽에 조그맣고 동그란 조각을 끼우지 않으면 애써 꿰맨 우산을 다 풀고 다시 꿰매야 합니다. 바느질을 마친 우산을 결 하나 흐트러짐 없이 예쁘게 접느라 때때로 동그란 조각을 빠뜨리곤 했는데, 이때마다 바느질을 새로 다시 해야 하는 어머니한테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쓰시던 '신문 돌리기 표'. 오른쪽은 제가 맡아서 돌리던 곳 표입니다. 작고 긴 종이조각은, 더 넣어야 하는데 힘들어서 못 넣어 저보고 넣어 달라며 따로 적은 쪽지입니다.
 어머니가 쓰시던 '신문 돌리기 표'. 오른쪽은 제가 맡아서 돌리던 곳 표입니다. 작고 긴 종이조각은, 더 넣어야 하는데 힘들어서 못 넣어 저보고 넣어 달라며 따로 적은 쪽지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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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업 가운데에는 아기를 보는 부업이 제법 쏠쏠합니다. 그렇지만 모두들 집일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부업을 늘 하고 있으시니 아기를 보는 부업은 오래 못하시기 일쑤입니다. 여느 때에도 집살림 하느라 손목이며 다리이며 허리이며 남아날 날이 없으니까요. 짧은 기간동안 일하고 벌이가 가장 나은 애보기이지만, 집에서 애보기를 해 줄 착하고 얌전한 딸아이가 있지 않고서는 이 부업은 좀처럼 하지 못합니다.

우리 집은 딸아이 없이 아들아이만 둘입니다. 어머니는 이내 이 두 아들아이를 잘 살릴 수 있는 부업거리를 찾습니다. 아니, 어머니 몸에 맞추어 얻은 부업거리라 할 텐데, 동네 집집마다 다니며 신문 넣는 일을 맡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도 신문 돌리기를 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날마다 모든 집을 샅샅이 다니며 신문을 돌리는 일이 퍽 만만하지 않지만, 신문 보급소에서는 누구보다 '아줌마'를 반겼습니다.

학생들은 방학 때만 일하고, 젊은이는 이 일을 안 하려 하며, 아줌마는 으레 집에만 있기 마련이라 따로 빠지는 날 없이 잘 돌리며, 동네 이웃한테 신문을 보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아줌마들을 일꾼으로 부릴 때에는 여느 젊은이한테 주는 일삯에서 절반만 주어도 되니 무척 좋아했습니다(이제 와 돌아보면 노동착취입니다. 게다가 초중고등학생을 일꾼으로 쓰면 여느 젊은이 일삯에서 1/3만 주었으니 더욱 모진 노동착취를 했던 지난날 신문 보급소입니다.)

한 동네 아줌마들이 모든 신문을 다 함께 돌리고 있었기에 서로 나누어 돌리곤 했습니다.
 한 동네 아줌마들이 모든 신문을 다 함께 돌리고 있었기에 서로 나누어 돌리곤 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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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주말이면 형하고 저하고 어머니하고 1/3씩 갈라 신문을 넣습니다. 어머니와 형은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다니며 넣고, 저는 신나게 달리고 뛰며 넣습니다. 5층 아파트에서 4∼5층이 많이 들어가는 곳은 제가 도맡습니다. 4∼5층까지 오르락내리락하며 신문을 넣을 때에는 한 번에 계단을 몇 씩 넘느냐를 놓고 혼자서 즐깁니다.

1/3씩 나누어 돌리지만, 내 몫을 얼른 돌리고 어머니 몫을 거들자고 생각합니다. 이웃 아주머니가 함께 신문을 돌리고 있으면, 이웃 아주머니가 올라가기 힘든 높은 층은 맡아서 넣어 주곤 합니다. 이웃 아주머니가 우유 돌리기를 하고 있으면 이 우유까지 받아서 높은 층에 올라갔다가 내려옵니다.

국민학생부터 어머니 신문 부업을 거들던 흐름은 중학생이 되어 저녁 열 시까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해야 하면서 주말만 거듭니다. 국민학생 때에는 날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함께 돌렸거든요. 고등학생이 되니 토요일 어머니가 신문을 돌릴 낮 무렵에도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자율학습을 하는 몸이 됩니다. 담임 선생한테 '어머니가 신문 돌리는 부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율학습은 내가 집에 가서 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받아들여 주지 않습니다. 아마 담임 선생은 '어머니 부업 때문에 토요일 자율학습 안 하겠다'고 하는 학생 말은 '자율학습 빠지고 어디 놀러 가겠다'는 소리로만 여겼겠지요. 정 못미더우면 담임 선생이 집으로 전화 한 통 넣으면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을 텐데요.

 ㄴ. 국민학교 3학년 때 알아챈 '촌지'

국민학교를 다니던 무렵 학교에서는 노상 개구지게 놀았습니다. 홀수 학년에서는 개구지게 놀고, 짝수 학년에서는 아주 얌전한 아이로 지내곤 했으나, 마지막 짝수 학년인 6학년 때에도 옴팡진 개구쟁이였습니다. 마지막 한 해까지 얌전하게 지내자니 무언가 아까웠다고 할까요.

홀수 학년이던 3학년 무렵, 학교에서 동무들하고 쉴새없이 개구지게 놀았는데, 어느 날 담임 선생한테 크게 꾸지람을 들으면서 '내일 아버지 모시고 와!'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 하면 안 될까요?'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여쭈지만, 담임 선생은 '아버지를 모시고 와!' 하고 윽박지릅니다.

집으로 가면 아버지한테 또 어떻게 꾸지람을 들으며 구두주걱으로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얻어맞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말을 않으면 이튿날 학교에 가서 '왜 아버지 안 불러 왔느냐!' 하면서 곱배기로 얻어맞을 생각을 하니, 학교에서 한 번 덜 맞고 집에서 얻어맞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 했는데 안 모시고 온 동무들이 담임 선생한테 하루 내내 얼마나 흠씬 얻어맞고 얼마나 욕지꺼리를 들으며 얼마나 벌을 서며 고달팠는가를 훤히 보았거든요.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일하는 아버지는 새벽바람으로 시외버스역으로 나가 시외버스를 타고 일하러 갑니다. 저녁에도 똑같이 시외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옵니다. 우리 집이 신흥동3가에 있는 5층짜리 아파트인 까닭은 아무래도 아버지가 경기도 이곳저곳으로 일하러 다니려면 시외버스역하고 가까운 곳이어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여느 날처럼 저녁 늦게 아버지가 잔뜩 지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형하고 저는 아버지 다리를 한 짝씩 붙잡고 꾸욱꾸욱 주무릅니다. 한 시간 남짓 허벅지와 종아리와 발바닥과 발가락과 등허리까지 다 주무르고 나서 겨우 말을 꺼냅니다. "아버지, 내일 담임 선생님이 학교로 오시래요." "야, 내가 학교 선생인데 어떻게 너네 학교에 가냐. 내 학교에 가야지."

아버지가 내 국민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한테 갖다 주라고 하던 '돈봉투'. 이 돈봉투는 끝내 담임 선생한테 주지 않았고, 아버지한테도 '담임 선생한테 주었는지 안 주었는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내 국민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한테 갖다 주라고 하던 '돈봉투'. 이 돈봉투는 끝내 담임 선생한테 주지 않았고, 아버지한테도 '담임 선생한테 주었는지 안 주었는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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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아버지보고 학교로 오라 했으면 틀림없이 아들내미가 학교에서 뭔가 단단히 일을 치렀다는 소리일 텐데, 외려 아버지는 딱히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러더니 저와 형보고 너희 방으로 가 있으라 한 다음, 한참 뒤 저만 따로 불러 "나는 너네 담임 선생처럼 국민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학교로 찾아뵐 수는 없고, 대신 이거를 갖다 드려라." 하고 말씀합니다.

한자를 두 글자 적어 내민 하얀 봉투를 받고 방으로 돌아옵니다. 이 봉투는 뭘까 궁금합니다. 봉투를 열 수 없지만 겉에 적힌 글월이 궁금하여 옥편을 뒤져 찾아봅니다. 옥편을 뒤져 한자를 알아낸 다음, 이 한자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봅니다.

아버지는 내 담임 선생한테 '돈봉투'를 건네려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학교에서 돈봉투를 받으시나? 밤새 잠자리에서 혼자 끄윽끄윽 울며 이 돈봉투를 어찌해야 하나 걱정에 휩싸입니다. 이 봉투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는 도무지 이 봉투를 담임 선생한테 갖다 줄 수 없습니다.

이튿날 담임 선생이 불러서 묻습니다.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느냐?" "네, 그런데 아버지는 국민학교 교사라서 오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담임 선생은 몇 가지 더 묻다가 반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뒤 한 주 남짓 살얼음 같은 나날이 이어집니다. 아버지는 돈봉투를 제대로 갖다 드렸는지 더 묻지 않았고, 담임 선생은 저를 거의 쳐다보지 않는 가운데 무언가 늘 따돌려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무렵 아버지 한 달치 일삯이 20만 원 안팎이었다고 떠오르는데, 아버지가 돈봉투에 넣은 돈은 3만 원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태그:#신문배달, #돈봉투, #촌지, #내가 살던 인천, #인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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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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