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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의 여름 몽골 현지인들은 어릴때부터 말과 가까이 지낸다.
▲ 몽골에서의 여름 몽골 현지인들은 어릴때부터 말과 가까이 지낸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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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하면 떠오르는 것은 광활한 초원과 말이다. 말을 타고 대초원을 질주하면 한여름의 무더위도 싹 가시지 않을까. 약 4주간의 몽골여행을 시작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런 상상을 했었다. 말 위에 올라서 고삐를 잡고 신나게 달려가는 나의 모습, 한 폭의 그림같은 장면은 안 될지 몰라도 나름대로 폼나는 모습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비사막을 지나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던 도중에 첫 번째로 말을 탈 기회가 생겼다. 말의 성질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상식은 가지고 있었다. 말의 뒤에 서 있으면 안 된다. 그랬다가는 말이 뒷다리를 들어서 내 가슴을 뻥 차버릴 가능성이 많다. 말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뒤에 누가 있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말의 턱밑을 만져주면 말이 좋아한단다.

문제는 말에 올라탄 다음이다. 말이 천천히 걷기만 하면 좋겠지만, 어떤 돌발상황 때문에 갑자기 달려가는 경우가 생긴다. 이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말이 달리기 시작하면 당연히 말의 몸도 위아래로 더 심하게 움직일 테고, 올라탄 사람은 자신의 몸을 그 움직임에 맞춰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사람도 위험하거니와 말도 피곤해진다. 말이 피곤해지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첫 번째로 만난 승마코스는 넓은 평지였다. 평지니까 말이 자극을 받을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럼 거기에 올라탄 사람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사실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는 것만으로는 크게 다칠 가능성이 없단다. 진짜 심각한 것은 말과 함께 넘어지면서 말 밑에 깔리는 경우다. '수퍼맨' 크리스토퍼 리브가 그렇게 다쳤다고 하던가.

아무튼 나는 가이드가 데리고 온 말에 올라탔다. 그냥 보기에는 그리 큰 말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막상 말에 오르고 나니까 높은 곳에 올라온 듯한 기분이 든다. 떨어지면 큰일이다. 나는 두 손으로 안장에 있는 손잡이를 꼭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두 팔을 휘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말에 오른 내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손잡이에서 한 손을 떼는 것도 망설여진다. 한 손을 떼는 건 둘째치고 어찌나 긴장되는지 좌우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몽골 고원에서 말을 타는 여행

몽골의 여름 광활한 초원
▲ 몽골의 여름 광활한 초원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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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추!"

한국에서는 말을 몰 때 '이럇!" 하고 외치지만 몽골에서는 그 대신에 '추!'라고 한다. 추!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말에 어울리는 추임새다. 말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나에게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대신 고삐를 잡으라고 한다. 그것도 쉽지가 않다. 단단하게 고정된 손잡이를 잡고 있어도 불안한데 고삐를 잡는다? 고삐를 잡으면 훨씬 폼나겠지만 폼보다는 안전이 더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나는 폼을 택했다. 조심스럽게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양손으로 고삐를 잡았다. 말은 계속 천천히 걸어갔고 나는 말이 움직이는 리듬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었다. 끝까지 이렇게만 간다면 정말 좋을 텐데. 달리는 것도 좋겠지만 오늘이 첫 번째 승마니까 오늘은 그냥 걷기만 하자. 그리고 다음에 달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갑자기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평지 사이에 있는 얕은 내리막이었다. 말이 무엇에 자극 받았는지 달려나갔고 나는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 말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나는 순식간에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쓰러져갔다. 한쪽 발은 이미 등자에서 빠졌고 나는 고삐를 잡은 채 말의 옆구리에 매달린 꼴이 되었다.

말이 멈추지 않는다면 자력으로 내가 다시 안장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대신에, '어떻게 하면 충격을 덜 받고 떨어질까'를 생각했다. 말이 달릴수록 내 몸은 점점 땅과 가까워진다. 이때다 싶을 때 고삐를 놓았다. 그리고 나는 등부터 땅에 떨어졌다. 쿵.

충격도 거의 없었고 다친 곳도 없다. 대신에 스타일 구긴 것이 문제다. 영화 <혈의 누>의 차승원처럼 멋지게 달리지는 못할 망정 말에서 떨어지다니. 가이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마음 속으로 말했다. 어차피 오늘이 첫 번째 승마니까 액땜 한 번 했다고 치자. 다음에 타면 더 잘 탈 수 있을 거다.

어떻게 하면 말을 잘 탈 수 있을까

몽골 전통가옥 게르 몽골을 여행하면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 몽골 전통가옥 게르 몽골을 여행하면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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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말을 탄 곳은 호수 차간누르에서였다. 말을 타고 근처에 무슨 분화구처럼 생긴 곳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코스다. 가이드는 말 안 듣는 말에 발길질을 해가면서 나를 태웠다. 말을 탄 가이드가 앞장을 섰고 내가 탄 말은 그 뒤를 천천히 따랐다. 가는 길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는 자기 혼자 속력을 내서 멀리 앞서갔다. 내가 탄 말은 길을 다 알고 있는지 그래도 개의치 않고 천천히 걸어간다. 갑자기 뒤에서 경적소리가 들린다. 말이 걷고 있는 좁은 길 뒤로 승용차가 한 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길에서 비켜나려고 말의 고삐를 오른쪽으로 힘껏 틀었다.

말은 그래도 요지부동이다. 몇 번 반복했지만 말은 계속 직진만 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말에서 내려서 강제로 말을 한쪽으로 끌었다. 승용차는 지나갔고 나는 다시 말에 오르면 된다.

나같은 초보자가 가이드 없이 혼자 말에 오르면 안 된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나는 고삐를 잡고 한쪽 발을 등자에 걸친 채 힘차게 말에 올랐다. 아니 오르려고 했다. 반쯤 올라갔을 때 말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내 발은 등자에서 빠졌고 나는 고삐를 잡고 나도 모르게 말과 함께 뛰어갔다.

내가 아무리 빠르더라도 말만큼 빠를까. 말의 속도를 이기지 못한 나는 달려가는 도중에 고삐를 놓치고 땅에 정면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전력질주를 하다가 태클에 걸려 넘어지는 축구선수처럼.

이번에는 충격이 좀 강했다. 몇 초 동안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으니까. 하늘이 노랗고 눈 앞에서는 별이 보인다.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일어섰고 달려가던 말은 저 앞에 멈춰서 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창피하다는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가이드는 말을 끌고 나한테 오더니 괜찮으냐는 시늉을 해보인다. 가이드가 먼저 떠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잠시 원망의 감정이 생겼지만 가이드한테 무슨 죄가 있을까. 말을 탈 줄 모르는 내가 멍청한 거지.

그날 밤, 아랫배에 시커멓게 든 멍과 얼굴에 생긴 상처를 보면서 생각했다. 다시 말을 탈까 말까. 홉스골에 가면 말을 타는 여행을 할 수 있다. 한 번만 더 타보자. 뭐든지 삼세판이다. 그때 또 떨어지면 말에 대한 모든 미련을 접자. 나는 이렇게 마음 먹었다.

호숫가에서 마지막으로 말을 타다

테를지 국립공원 거북이처럼 생긴 거북바위
▲ 테를지 국립공원 거북이처럼 생긴 거북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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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호수 홉스골에 도착해서 다시 말을 탔다. 가이드와 함께 2박 3일 동안 말을 타고 호수 주변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음식과 짐을 챙겨서 앞서가는 말에 묶고 그 뒤를 따랐다. 밤에는 준비해간 소주를 마셨고, 아침에 일어나면 호숫물을 받아서 라면과 커피를 끓였다.

처음 이틀간은 아주 좋았다. 내가 탄 말은 평지는 물론이고 나무가 우거진 산속길도 잘 헤쳐나갔다. 그동안 두 차례 말을 탔던 것도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는지 고삐를 잡고 주위 경관도 비교적 여유있게 돌아볼 수 있었다.

마지막날이 문제였다. 승마여행이 끝나간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긴장을 풀었던 걸까. 아니 내가 긴장을 푼다고 해서 말이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다. 나무들이 늘어선 숲길을 걷던 도중이었다. 나뭇가지에 찔렸는지 벌레에 물렸는지 말이 또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동안 두 차례의 낙마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좀더 오래 버텼다. 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말을 진정시키려 했고 중심을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가로로 뻗어나온 주위의 나뭇가지들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거기에 부딪힐지 모르겠다.

달려가다가 나는 옆에 보이는 나무 기둥을 한 손으로 잡으며 고삐를 놓았고, 등자에서 발을 빼고 말에서 빠져나왔다. 말은 혼자 달려가다가 뭔가 허전한지 멈추어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에는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말을 통제하는 데는 실패했다.

세 번 말을 타서 세 번 모두 낙마. 3전 3패. 2박 3일간의 승마여행이 끝나갈 때쯤, 나는 두 번 다시 말을 타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후로 기회는 몇 번 있었지만 한 번도 말을 타지 않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몽골의 고원, 낙마가 옥의 티였던 그곳의 여름을 지금도 가끔 떠올린다. 몽골의 여름밤은 상쾌하지만 말을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테를지 국립공원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가까워서 많은 여행객이 이곳을 찾는다.
▲ 테를지 국립공원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가까워서 많은 여행객이 이곳을 찾는다.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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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0 이 여름을 화끈하게!' 공모 기사입니다.



#이 여름을 화끈하게#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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