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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만에 거제에서 나와 통영에 들렀습니다. 섬 구경에 더는 미련이 없지만 그냥 지나치긴 아쉬웠습니다. 도장포 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고현에서 시외버스를 갈아 탔습니다. 도시도 그렇지만 시골에선 더욱이 자전거 여행자가 별난 볼거리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 시선이 따갑습니다. 

 

통영은 거제와 같은 섬이지만 확연히 다른 느낌입니다. 거제가 천연의 자연 속에 사람이 기댄 모습이면 통영은 사람 안에 자연이 종속된 듯 합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자연은 사람이 만든 그 무엇이건 흔적 없이 무너뜨릴 수 있지만 그저 묵묵히 견뎌줄 뿐입니다.  

 

 

터미널에서 통영시청 방향으로 국도를 따라오면 얼마 안돼 관광안내소가 나옵니다. 터미널 건물 옆에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곳에서 모처럼 이메일을 확인하고 문명의 소란도 접했습니다. 그새 흉흉한 사건이 많이도 있었습니다. 안내소 직원이 자전거로 가기 수월한 길을 알려줘 고생을 덜었습니다.

 

북신사거리를 지나 중앙로의 활어시장과 서호 전통시장을 가로질러 문화마당에 도착했습니다. 한강 거북선이 있는 포구 건넛길이 온통 충무김밥집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북쪽 하늘을 보면 그 아래 유명한 '동피랑 벽화골목'이 보입니다. 한국의 나폴리란 별칭이 붙은 아름다운 곳이나 부산 산복도로의 기억이 생생해 이번엔 멀리서 보는 걸로 만족했습니다.

 

 

곧바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메뉴는 고민할 것 없이 충무김밥으로 정했는데 수많은 가게 중 어디로 갈 지가 고민이었습니다. 되도록 소박한 집을 고른다 골라 들어갔는데 방송에 소개된 횟수만 세 번인가 네 번이었습니다. 그럼 맛도 있고 주인도 친절해야 할 텐데 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언젠가 서울 도봉산 가던 길, 한 골목 전체에 K, S, M 방송에 골고루, 그것도 반복 출연한 가게들이 즐비했습니다. 그것만도 말이 안 된다 싶었는데 맛을 보고나니 반쯤은 사기당한 듯한 기분이 됐습니다. 이번에도 우려는 적중했고 여행하며 여러 번 같은 경험을 하고 나니 방송이나 신문에서 극찬하는 '맛집'이란 게 영 미덥지가 않습니다. 

 

 

배만 간신히 채우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에 말그대로 살이 익을 듯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온 길이 아까워서라도 볼 건 봐야겠지요. 무더위 속을 뚫고 해저터널과 남망산조각공원에 들렀다가 청마문학관과 이순신공원까지 둘러 봤습니다. 가긴 가면서도 해저터널을 제외하고 하나 같이 어찌나 높고 가파른 데 있던지 토로할 곳 없는 짜증이 일기도 했습니다.  

 

누적된 피로에 한낮 여정이 과했던 탓에 완전히 녹초가 됐습니다. 쫓기는 듯 통영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고성입니다. 바다 멀미가 나서 내륙으로 들어왔습니다. 예까지 오는 버스에서 한밤처럼 잤습니다. 

 

오늘은 이곳서 나고 자란 할머니 댁에 공짜로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고성시장 지나 좁은 골목길에서 나란히 걷던 할머니 두 분을 만났는데, 사정을 듣던 그 중 한 분이 "고마 내 집서 자라" 하신 겁니다.

 

힘든 건 차치하고 경비를 아낄 수 있단 생각에 넙죽 제안에 응했는데 낯선 이를 경계도 않고 집에 들이시는 걸 보니 되레 걱정스럽습니다.    

 

선뜻 방을 내주겠다 하신 할머니는 오는 내내 "집이 안 좋아서 우짜노" 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녹색 철문 안으로 마당과 대청마루 딸린 옛집이 무척 정겹습니다. 외할머니가 십여 년쯤 전 돌아가시고 이런 시골집이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저녁이 늦어 근처서 사먹고 오니 길 잃을까 노심초사하던 할머니가 마중을 나와 계셨습니다. 피곤하겠다며 옆방엔 벌써 이부자리와 모기장까지 쳐두셨고요. 이리 따뜻한 환대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어제 들은 뉴스가 기억납니다. 부산 사하구에서 나무 아래 쉬고 있던 노인을 어느 젊은 정신질환자가 살해했다지요.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병이 들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주인 할머니와 건넌방 세 든 할머니와 그 집 살다 집 얻어 나간 이웃집 할머니 셋이 한참 수다를 떠시다 이제 막 헤어지셨습니다. 저는 대청마루에 걸터 앉아 오래된 목욕탕 굴뚝 옆에 있는 달을 보고 있습니다. 낮 한때 팍팍해진 마음에 다시 바람이 붑니다.  

 

 


태그:#국내여행, #통영, #고성, #자전거,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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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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