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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9일 폭력 사태...
그러나 우리는 천 그루 나무가 잘려도 성미산을 살려낸 사람들이다 
왜 '2003년 성미산 싸움' 이야기인가? 지금 성미산은 커다란 위기에 있다. 홍익재단이 성미산의 가장 아름다운 남사면 숲을 훼손하고 그 자리에 홍대 안에 있는 홍익초중고를 이전시키겠다며 학교건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미산 주민들은 서울시가 홍익재단에 대체부지를 마련해주어 교육권을 보장하고, 성미산은 서울시민에게 돌려달라고 주장하며 두 달이 넘도록 성미산지키기 비상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먹고 살고, 자식 키우고 자기 계발하며 살기에도 너무 바쁜 서울 도심에서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2003년 성미산 싸움의 승리'에 대한 자부심과 그 자부심을 이어서 아름다운 성미산을 후대에 전해주고 싶은 나름의 사명감이다. 2003년 성미산 싸움을 경험한 필자가 당시를 회상하며 기록한 이 글은 홍익재단에게 '불의와 불법 단체'라는 딱지를 받고 있지만, 환경단체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서울 도심에서 생태와 대안적 삶을 실현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찬사를 받는 성미산마을공동체와 그들의 2010년 성미산지키기 비상행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20일 산상 철야 농성 시작하다

다시 벌목 직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월 30일 오후 몇몇 아빠들이 산에 올라 24시간 상주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두세 명은 들어가 쉴 수 있는 크기의 텐트를 쳤다. 한겨울인데다 산 위라 날이 너무 추웠다. 텐트만으로는 부족했다. 두어 시간 후, '나르는 어린이집' 혜림아빠 진상돈과 해솔아빠 섭섭이가 비닐하우스 자재를 한 세트 구입해서 올라왔다. 뚝딱뚝딱 하더니 텐트 위로 근사한 비닐하우스가 세워졌다. 앞뒤로 문을 내어 들고 나기도 편했다. 비닐 문이 바람을 막아주어 텐트 안이 제법 따뜻했다.

추운겨울에 친 성미산 천막농성장, 마을 주민은 120일 간이나 이 농성장을 24시간 지켰다.
▲ 성미산 산상텐트 추운겨울에 친 성미산 천막농성장, 마을 주민은 120일 간이나 이 농성장을 24시간 지켰다.
ⓒ 유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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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전, '풀잎새방과후'의 철이 아빠가 갈탄 난로를 메고 올라왔다. 자기 회사 공사 현장에서 쓰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실어 왔는데 산 위에서는 이게 최고란다. 갈탄 난로의 생김새가 신기하고 과연 따뜻할까 궁금해 애들처럼 난로를 에워싸고 살피는데 또 가져올 게 있다며 얼른 산 밑으로 내려가자 재촉한다. 영문도 모르고 가보니 산 밑에는 갈탄이 담긴 부대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모두 놀라며 이걸 산 위까지 어떻게 지고 올라가나 싶어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민수 아빠는 그래도 엄두를 내보자는 듯 '몇 달은 때겠네' 라고 중얼거리며 기쁘고도 착잡한 얼굴로 한 부대 집어 든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허허!  숲속 음악회 때 음향 장비는 댈 게 아니었다.

이틀 만에 산상 철야 농성장이 완벽하게 꾸려졌다. 2월 첫날밤부터는 비닐하우스와 갈탄 난로 덕에 칼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이 산 위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새벽 어르신들이 번을 교대하러 올라오셔서 텐트 옆 한 쪽에서 불씨를 머금은 채 얌전히 타고 있는 갈탄 난로를 보시고는 깜짝 놀라셨다.

"아니, 이 사람들 얼마 동안이나 산에서 이러려구 그래!"
"아예 살림을 차리지."

어르신들은 뭐든 주저 없이 순식간에 뚝딱뚝딱 해치우는 우리가 퍽 미더운 모양이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산상 철야 농성은 그 후 120여 일 동안이나 계속된다.

성미산마을의 역사는 성미산 텐트에서, 그것도 밤에 기획되었다

밤 9시께 남자들 셋이 깜깜한 산에 올라 텐트에 모여 앉으면 대체 뭘 하겠는가? 신성한 농성장에서 남들 이목이 있지 화투판을 벌일 수도 없는 일. 성미산 이야기도 벌써 2년여 해온 얘기, 한 20분하다 보면 동난다. 자연스레 이런저런 세상사는 얘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어차피 새벽 너덧 시면 어르신들 올라오셔서 텐트자락 살며시 열고 들여다 보시니 더 누워 있을 수도 없어 아예 잠들기마저 포기했다. 술 생각이 간절했다. 추운 겨울에 날밤 새려면 술은 철야조의 필수 장비였다.

처음 얼마 동안 엄마들도 아빠들의 산상 음주를 허용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번을 서러 올라오는 아빠들 몸수색을 시작했다. 궁하면 통하는 법, 야구 경기장에 갖고 들어가는 '팩 술'을 가방에 넣어 가거나 낮에 술을 산중 모처에 묻어 놓고 밤에 캐내 먹는 방법까지 동원되었다. 숨겨 놓고 야금야금 먹는 술은 또 왜 그리 달던지. 어르신들도 대충 우릴 이해하시고 눈감아 주셨다.

철야조는 대체로 조합별로 짜는데 수가 안 맞으면 다른 조합의 사람과 짝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마음 맞는 아빠 서넛이 모이면 그날 밤은 신명나는 밤이 된다. 코펠에 끓인 라면 국물을 뜨며, 밤새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날 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사실 산상 철야 기간 동안 마을의 웬만한 대소사는 거기 텐트 안에서 다 거론되었다. 대표적으로 의료생협하자던 단하 아빠의 제안만 해도 그렇다. 단하 아빠가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어 그 일이 중도작파되자, '사람 병원 안 되면 차 병원이라도 하자'는 제안이 바로 거기 텐트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해 11월 1일 차병원이 문을 열었다.

어른들이 산을 지키느라 고생한다고 어린이들이 와서 노래를 불러주었다.
▲ 농성텐트를 찾아와서 노래를 불러주는 도토리방과후 아이들 어른들이 산을 지키느라 고생한다고 어린이들이 와서 노래를 불러주었다.
ⓒ 유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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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산학교의 싹도 여기서 트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어린이집 졸업반 아이를 둔 엄마 아빠들 중에는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낼까 어쩔까 고민하다 하남시 대안초등학교 설명회까지 다녀온 이들도 있었다. '아니 애들 덕에 어른들이 재밌게 살 만해지니까, 또 애들 땜에 이사 간다고?'

모두들 누가 언제 이사 갈지 모른다고 아쉬워하며 수군댔다.

그러다 어느 날 불쑥 철야 텐트에서 '우리 동네에도 대안학교 하나 만들지 뭐.' 이런 아빠들의 수다가 씨앗이 되어 5월에 첫 학교 준비 워크숍이 열렸다. 그리고 이듬해 2004년 9월, 초중고 12년제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를 개교한다.  성미산마을의 역사는 이렇게 한밤의 철야 텐트 속에서 꿈으로 영글어 가고 있었다.

다시 산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몸으로 막다

성미산 마을 주민이 성미산에 들어온 포클레인에 초록색 리본을 묶었다. 살려주세요!
▲ 성미산을 살려주세요! 성미산 마을 주민이 성미산에 들어온 포클레인에 초록색 리본을 묶었다. 살려주세요!
ⓒ 유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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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산상 농성은 이어지고, 두 번째 시청 항의 방문을 한 다음 날이었다. 저들은 또다시 공사를 강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오전 8시경 출근하려 전철을 타려는 순간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공사 강행 움직임, 빨리 산으로!"

내 발길은 한달음에 산으로 향했다. 전기톱을 든 공사업체 직원들과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 직원 40여 명이 지난 번 베어 낸 나무를 끌어내린다며 굴착기 2대를 앞세워 약수터 쪽 진입로를 통해 산에 막 오르려는 중이었다.

"굴착기 두 대가 산으로 이동 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는데 현장에 주민이 세 사람밖에 없더라고요. 급한 마음에 세준 아빠랑 굴착기에 매달렸지요 뭐. 그렇게 한 20분쯤 버티니까 사람들이 몰려오더군요."

무리아빠의 말이다.

상황을 듣고 보니 기가 막혔다. 새벽에 산을 지키신 어르신과 문자 받고 먼저 달려온 주민 댓 명이 우선 밀고 들어오는 굴착기 삽 위에 올라가 앉고, 바퀴 밑에 드러누워 굴착기의 진입을 맨몸으로 막아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비상 연락망으로 연락 받은 주민 50~60명이 30분도 안 되어 현장으로 달려와 합세했다. 두 번은 절대 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실랑이를 벌이고서야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마디를 내던지고 철수했다.

"그래 이 산에 다람쥐 한 마리가 살아요? 쥐새끼 한 마리라도 있어요?"

굴착기 앞세워 전기톱 들고 나타나서는 맨몸으로 막아서는 주민들에게 던진 상수도사업본부 직원의 이 한마디는 성미산 주민들의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그는 성난 주민들의 고함 소리에 쫓겨나듯 돌아가야만 했다.

결전을 대비한 비상대책을 세우다

두 번째 상수도사업본부의 공사 강행을 저지하고 나서 우리는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언제 다시 굴착기를 밀고 들어와 산을 들쑤셔 놓을지 알 수 없었다. 공사 강행이 있은 후부터 구청장(7일), 상수도사업본부(10일)에 이어 시청(12일)까지 연일 고단한 방문 일정을 추진한 것도 예상되는 무리한 공사 강행을 저지하다 주민들이 다치는 불상사가 생길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12일 낮, 시청 앞 기자 회견을 하고 와서 대책을 논의하던 주민들 사이에서 낌새가 이상하단 이야기가 나왔다. 2월 20일 있었던 1차 공사 강행도 19일 시청 앞 시위 다음 날이었다며 아무래도13일이 심상치 않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건너편 공사 현장 사무실의 움직임도 수상하다는 것이다. 상수도사업본부는 이미 그 주 안에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통보한 바 있어 이런 정황을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대책위는 몇 가지를 결정했다. 13일 아침 공사 강행에 대비해 비상 연락망을 점검하고 현장 사무실 감시를 철저히 하기로 했다. 세혁이네에서 그 사무실이 잘 보이니 세혁아빠가 집에서 수시로 감시하며 번을 서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철야조는 인원수를 늘리기로 하고 수시로 야간 순찰을 강화하기로 했다.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순찰 차량으로 봉고차를 투입하기로 했다.

나는 상호아빠, 김종호 대책위원장, 근아아빠 그리고 젊은 아빠들 몇 명과 함께 공사업체의 유력한 침입 루트라고 판단되는 약수터 쪽 입구 길가에 봉고차를 세워 두고 차 안에서 대기했다. 그렇게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동이 트는데……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전날 저녁 우리들이 함께 한 염려가 기우는 아니었다. 어라? 그런데…… !

"허걱 저건 백골단이잖아"

성미산 벌목을 하러 백골단까지 등장했다.
▲ 성미산에 올라온 백골단 성미산 벌목을 하러 백골단까지 등장했다.
ⓒ 유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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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뭐야!" "쟤네들 저거 저거……!"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얀 헬멧에 장갑을 끼고 5열 종대로 서서 구령을 외치며 뛰어오는 무리가 보였다. 멀리서 봐도 지난 번 공사 인부들이 아니었다. 덩치를 보나 뛰어오는 모습이나 그 기세를 보나 틀림없는 '깡패'들이었다.

모두 100여 명쯤 돼 보였다. 80년대 초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학생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그 악명 높은 '백골단'을 여기 작은 동네 골목에서 다시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순간 20여 년 전의 그 공포가 전기처럼, 정수리에서 발목까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우리는 재빨리 산 입구로 뛰었다. 그들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어야 했다. 바로 우리의 비상 연락망이 가동되었다. 백골단과 먼저 모인 우리 20여 명은 스크럼을 짜고 서로 마주했다. 말로 몇 차례 공방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건장한 깡패들은 누군가의 명령을 받았는지 우리들을 하나씩 끌어내기 시작했다. 아빠들 몇몇이 질질 끌려 나갔다.

"너희들 누구야?"
"너희들이 누군데 우리를 끌어내!"
"우리 산이야, 우리 산이야!"
"너희들 깡패지?"

미리 준비한 우리 측 카메라 두세 대가 근접해서 촬영을 한다. 그러자 그들도 조금은 부담스러운가 보다. 한 사람이 끌려 나가면 열 사람이 몰려온다. 마침 출근 시간 전이라 모두 신속히 달려왔다.

굴착기 두대가 성미산에 등장했다.
▲ 성미산 초입에 등장한 굴착기 굴착기 두대가 성미산에 등장했다.
ⓒ 유창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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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온몸으로 버티고 있는 동안 어느새 우리 편도 100여 명이 되었다. 안심이 되었다. 이제 다시 진영이 정돈된다. 우리는 산 쪽에서 내려다보고 그들은 길 쪽에서 우리들을 올려보며 대거리를 주고받는다. 깡패들이야 할 말이 없고 공사업체 간부들이 나선다. 상수도사업본부 관계자들은 안 보인다.
'궂은일'에 끼기 싫었나 부지? 그러고 보니 그들은 길 건너 인도에서 팔짱 끼고 착잡한 듯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연신 마른 입을 손으로 쓸어 대며 눈을 떼지 않고 서 있다. 속으로 주먹질을 해댔다. 가서 딱 한 대씩 패 주고 싶었다. 비겁한 놈들. 자연을 지키겠다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용역 깡패들 밀어 넣고 실무 책임자라는 공무원이란 자들은 '길 건너 쌈 구경'이나 하고 있으니.

깡패들의 초반 진입을 잘 막아낸 우리들은 100명이 넘는 숫자도 숫자지만 뒤늦게 놀라 뛰쳐나오신 어르신들까지 합세하니 사기 충천이었다. 제압은커녕 산으로 한 발짝도 못 들어선 그들도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소강상태로 오전이 지나가고 12시가 다 되었다.


태그:#성미산, #2003 성미산싸움, #성미산마을, #성미산지키기, #홍익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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