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피할 수 없는 비
화면 위로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해안 언덕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그 풍경을 물끄러미 보고 서 있는 아가씨의 뒷모습은 어쩐지 익숙한 면이 있어보였다. 그리고 성우의 음성이 또다시 나레이션이 이어지며 일기의 내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발걸음 하나 내딛을 곳 없이 바닥에는 송곳으로 가득찬 느낌이다. 무엇을 향해 가란 말인가?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산다는 건 세상과 자아 사이에 단단한 막 하나를 쳐놓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 버릴까?"
그리고 예의 그 익숙한 일기장을 떠올리게 하는 년도, 월, 일의 순서로 하루의 배열상태가 이어졌다.
1999년 8월 5일
도서관에서 내려오는 중에 억수 같이 비가 쏟아졌다. 비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하품을 했다. 하루 종일 어느 누구와도 말할 겨를이 없었던 탓에 저녁이 되니 참을 수 없는 입냄새가 풍겨져왔다. 내게도 이런 지독한 냄새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일부분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 같은 마음에 잠시 낯선 기분이 몰려왔다.
조금 있으면 비가 그치겠지 하고서 기다려봤지만 비는 끝없이 땅으로 얼굴을 묻으며 눈물 자국을 숨기고 있었다. 세찬 비는 버스 마감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쉼없이 자신의 형용할 수 없는 설움을 토해내고 있었기에 나는 책을 담아왔었던 쇼핑백을 꺼내서 머리를 가린 채로 무작정 뛰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 뭐!"
지나가던 한 무리의 중학생 녀석 중 하나가 힐끗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그래, 피할 수 없는 비를 덜 맞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온 몸은 다 젖어버린다.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말이다. 그 순간 눈물이 핑하고 돌았고 '어느 곳이든 이 주체할 수 없는 영혼을 거둬가다오' 하고 속으로 외치며 빗속의 수녀원길을 달려내려갔다. 그때 저만치서 검고 넓다란, 금방 산 것만 같은 우산을 쓴 수녀 하나가 천천히 언덕 길을 걸어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수녀! 그래, 그녀는 나를 받아 줄 거야.'
나는 반가움과 희열에 들떠서 무의식 중에 달려갔다. 그 순간 그녀는 흠칫하며 옆으로 몸을 뺐다. 방황하던 내 마음과 지긋지긋한 운명같은 이 비를 피하고 싶은 간절함은 그녀가 구원의 대상이라도 되는 듯이 보여서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그녀의 우산으로 다가갔지만 그녀는 화들짝 거리며 매몰차게 나를 피해가 버린거다.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그녀는 수녀가 아닌 하나의 여자였다. 신을 위해 살아가는 청렴의 구도자라는 이름 보다는 피할 수 없는 빗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한 여자로서 자신의 소중한 그 무엇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당신을 내 맘 속에 들일 수 없다' 는 무언의 의미를 가득 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우산 손잡이를 단단히 쥔채로 갈길을 휑하니 가버렸다.
내가 따라오기라도 할까봐 바삐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 그녀의 등 뒤에서 나는 땅으로 내려 꽂히는 빗물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숙이고 잠시 서있었다. 그러던 중 뒤쪽에서 떨리는 소리로 그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아가씨... 우산을 하나 빌려줄테니... 나를 따라와요."
미안했던 것일까? 그녀는 좀 전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것인지 목소리도 차분하게 가다듬고 말을 건넸다. 좀전과 다르게 너무나 다정해진 그녀는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그 크고 깨끗한 우산을 함께 쓴 채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수녀원 언덕을 향해서 함께 걸어가는 동안 비는 조금씩 그치고 있었다. 나는 '이젠 당신의 우산이 쓸모가 없어졌어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회개를 하는 기회를 박탈하고 싶지가 않았다.
애써 웃으며 낡은 우산 하나를 창고에서 가져온 그녀는 돌려줄 필요는 없으니 그냥 가지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곤 얼굴이 발그스름해져서는 무안한 듯 힐끗 고개를 돌렸다. 수녀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화장품 냄새도 슬며시 스치고 있었고, 아직 막히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귀 뚫은 자국이 수녀가 되기 전의 여자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어느 순간 어떤 연유로 그녀의 심장을 관통한 생각의 부스러기들은 길고 끝을 알수 없는 미로를 거쳐서 수녀라는 길에 그녀를 데려놓았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비를 피해서, 혹은 투철한 신앙의 어느 한 곳에 귀착점을 잡고서...
'지금 행복한가요?'
나는 속으로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조용히 몸을 돌려 수녀원 언덕을 내려왔다. 손에는 이미 쓸모 없어진 우산을 든 채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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