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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을 뜨겁게 달구던 불볕더위도 서서히 물러가는 모양이다. 엊그제부터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돌기에 산골짜기니까 그러겠지 했다. 그런데 달력을 보니까 고개가 끄덕여진다.

 

 

작년(1991년)에도 7월이 시작되면서 중촌리를 찾았는데, 가물어서인지 옆집 김씨가 논을 갈고 있었다. 걱정되어 지금 농사를 시작해도 수확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대가 높은 산골의 천수답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올해는 며칠 이르지만, 한 달 남짓 사이에 모들이 무릎까지 자랐으니 놀랄 수밖에.     

 

아침 지을 쌀을 바가지에 담아 뒤꼍 샘가로 향한다. 쌀을 씻으려니까 손바닥이 너무 시원한 물은 싫다고 한다. 차가운 기운이 피부로 전해지면서 닭살이 돋는다. 사계절이 정확하게 반복하는 우주의 섭리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엊그제는 논에 다녀오는 영국이 아버지하고 앉아 입추(立秋)가 며칠 남지 않았다며 빠른 세월을 탓하기도 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없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앞마당으로 내려가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을 대하는 버릇이 생겼다. '인생은 아침이슬과 같다'는 글귀를 떠올리면서.

 

밥을 안치고 방에 들어와 손을 꼽아보니까, 이곳 고가(古家) 사랑채에서 생활을 시작한 지 40일이 되어간다. 심신을 단련할 수 있도록 가족처럼 대해준 마을 주민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든다. 오늘부터는 서서히 집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동안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보고 싶다는 편지를 두 통이나 보내왔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오라고 하는 걸 보면 엄한 아버지도 떨어져 있으니까 보고 싶은 모양이다. 마음이야 당장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이곳 생활도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나와의 약속이니 함부로 저버릴 수 없다.

 

아내와 8월 중순 이전에 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곧 돌아가겠지만, 두 가지 일은 치러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하나는 동네 어르신들을 사랑채로 초대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합천 장날 영국이랑 영미랑 자장면이나 국밥을 사 먹으러 가기로 했던 약속이다.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 지필묵을 꺼낸다. 화선지(畫宣紙)에 서진(書鎭)을 올려놓고 먹을 갈기 시작한다. 묵향에 빠져들 즈음에 오전에는 잘 오지 않던 영국이와 영미가 들어온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며칠 후에 집에 간다니까 겨울방학 때는 오지 않느냐고 묻는다. 해어지는 걸 못마땅해하는 표정들이다.

 

"아저씨 글 연습해야 하니까, 점심 먹고 만나자."

"이거이 뭐꼬? 오빠야! 이거 좀 바라."

 

영미는 예쁘게 조각된 서진을 요리조리 만져보며 오빠를 부른다. 마당에서 풀벌레를 잡고 있던 영국이는 왜 부르느냐고 묻지도 않고 달려온다. 영국이도 큰 붓과 벼루를 보고 놀라며 이것저것 성가시도록 묻는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서예의 기본에 대해 설명을 듣던 영국이는 자기가 먹을 갈겠다고 나선다. 영미도 갈아보겠다고 나서며 서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얼굴에 가뜩 서려 있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욕심을 풀어주기 위해 타협안을 내놓는다.

 

"그러면 너희가 갈아보거라. 사십 분은 갈아야 하니까, 두 사람 다 시간을 지키면 영미에게 서진을 선물하마!"

"그리 할랍니더, 아저씨는 푹 쉬이소."

 

아껴오던 서진이지만,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선물하겠다니까 영미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붓과 벼루에 관심을 보이던 영국이가 먼저 달려들어 먹을 잡는다. 동생 생각하는 마음이 부러울 정도다.

 

한쪽으로 비켜 앉아 집에 갈 날을 꼽아보며 그동안 잘못한 일은 없었는지, 지난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내일은 합천 장에 다녀오고, 기차표를 예매하러 진주에도 다녀와야 한다. 영국이 아빠에게 남강의 촉석루도 둘러볼 겸 함께 가자고 했더니, 조 선생 덕으로 10년 만에 진주 구경하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겨우 20분 지났는데 영국이 손의 회전속도가 느려진다. 팔이 아픈 모양이다. 어렸을 때 서당에서 힘들게 먹을 갈 때가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 욕심이 앞서서 힘을 주니까 팔이 아픈 것은 당연하다. 영국이는 "하 덥다, 더워!"라며 먹을 벼루에 내려놓더니 이마의 땀을 닦는다. 서진을 받지 못하게 됐다며 투덜거린다.

 

아이들은 다음날 합천 장에 가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고, 붓을 잡으니까 붓끝이 마음먹은 대로 따라가 주지 않는다. 마음 한구석으로 허전함이 밀려온다. 아내와 딸을 만나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어딘가 서운하다. 심신을 단련하려고 들어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깊이까지 정이 스며든 모양이다.

 

자리를 정리하고 점심을 준비하는데 영미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온다. 내일 상가면에 있는 이모 집에 심부름 가야 한다며 울상이다. 그렇다면 나도 장에 나갈 필요가 없다. 영미가 돌아가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니 서진을 선물하고 가야겠다는 결정이 선다. 영미가 좋아하는 물건을 선물하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아픈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중촌리를 떠나기 전날

 

이틀 전 표를 예매하러 영국이 아빠와 진주에 다녀와 마을 어르신들을 초청했다. 준비라고 해야 이곳에서 구입 할 수 있는 것은 담배와 비닐병에 들어 있는 소주뿐이다. 그래서 며칠 전 우체국 집배원 아저씨에게 맥주 몇 병과 새우깡, 노인들이 좋아하는 '해태 산도'를 몇 봉지 부탁했다.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니까, 안락당(安樂堂)으로 한 분씩 모인다.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출출했는지 막걸리를 한 잔씩 돌린다. 영국이 엄마는 고맙게도 집에서 키운 닭으로 백숙을 해오셨다. 소를 두 마리나 먹이는 옆집 김씨는 아주머니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참석했고, 뒷집 박씨 아저씨는 보름달보다 큰 수박을 가슴에 품고 마을 이장과 함께 들어온다.

 

주변이 깜깜해지니까 서까래에 길게 매달린 백열등은 빛을 더욱 발한다. 잠자리와 나비들이 전구 주위로 몰려들어 파드득거린다. 그들도 송별회에 참석하러 온 모양이다. 따뜻하고 환한 곳이 좋은지 날아갈 생각도 않고 백열등 주위를 맴돈다. 돌담을 넘어오는 풀벌레들의 합창이 분위기를 한껏 돋워준다. 

 

중촌리의 밤은 한 달 넘게 이웃으로 지낸 사람들이 서로의 정을 확인하면서 서서히 깊어간다. 대화가 무르익자 옆집 김씨가 오늘만큼은 아저씨가 아닌 형님으로 불러달라며 자기도 동생이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그렇게 하시지요. 저도 좋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폭소가 터졌고, 대화가 새롭게 시작된다.

 

산골 마을 빈집 사랑채에서 주고받는 정담은 끝없이 이어진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어우러지며 웃음바다가 된다. 사투리가 재미있는지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말을 시킨다. 오가는 대화 속에서 지역감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평소 무뚝뚝하면서도 동네 노인들을 부모처럼 모시는 이장이 입을 연다.

 

"조 선생요, 내년에도 꼭 오소."

"그럼요, 아내와 상의해서 시간을 내봐야죠."

 

내년에도 오겠다고 장담을 할 수가 없어 확답은 피한다. 또 오라는 짧은 인사이지만, 딱딱한 사투리에 깊은 정이 묻어난다.

 

"박씨, 그 맥주 이리 가져오소!"

 

이장은 남은 수박을 자르며 수박은 얼마 전 수송아지를 순산한 박씨가 산 것이고, 지금부터 나오는 맥주는 면까지 나가서 자기가 사온 거라고 강조한다. 맥주 한 잔, 막걸리 한 잔에 가슴 깊이까지 분홍색 정이 스며들고, 백열등에 반사된 얼굴들은 더욱 붉어져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위 풀벌레들도 잠을 자는지 소리가 줄고, 산비둘기 우는소리가 공간을 메워준다. 아쉬움 속에서도 아름다운 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자리가 한 자리씩 비어간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은 막걸리가 떨어졌을 때 "또 오이소마!"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자장면은 먹으러 나가지 못했지만, 선물로 대신했고 술자리도 마련했으니 도리는 다 한 것 같다. 손님들은 11시가 넘어서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내일은 오후 8시 진주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하니까 오후에 정든 중촌리를 떠나야 한다.

 

작년에는 집에 갈 때 일곱 시간 가까이 걸리는 버스를 이용했는데, 올해는 좀 더 복잡하고 피곤해도 진주에서 야간열차를 이용해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메주나 고추 심부름도 기차를 이용하는 곳이면 자청할 정도로 기차여행을 좋아했고, 앞으로는 날 새도록 기차여행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마음먹고 내린 결단이었다.

 

이곳 중촌리에서는 산짐승과 풀벌레들 울음소리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집에 가는 날만큼은 차창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골의 밤 풍경, 간이역의 희미한 불빛, 어떤 악기연주에도 뒤지지 않는 심야의 기차 바퀴 소리를 감상하고 싶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몸은 황토냄새가 진동하는 산골짝 고가(古家)의 사랑방 구들장 위에 누워 있지만, 마음은 혼잡하고 시끄러운 야간열차에 탑승해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기차 바퀴의 '덜커덩'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연출 없는 자연의 밤무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중촌리 일기' 끝]

덧붙이는 글 | 지인의 소개로 91, 92년 여름을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 목곡마을의 어느 고가(古家) 사랑채에서 지냈는데요. 당시 경험했던 아스라한 추억들을 '중촌리 일기'1, 2, 3으로 정리했습니다. 작년 9월 아내와 함께 다녀왔는데요. 영국이 엄마가 반가워하더군요. 그러나 이장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은 한 분도 만나지 못했고,물이 말라버린 계곡에 잡초만 무성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태그:#여름, #경남 합천 중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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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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