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1일 오전, 광화문 세종로 정부청사 앞. 광화문 복원 현판을 두고 세 목소리가 들린다.
1. 한글학회 등 한말글 관련 단체 회원들은 정부중앙청사 앞에 모여 "광화문에 한자 현판 대신 훈민정음 글씨로 된 한글 현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1세기 한글시대에 한자 현판은 문화재로서나 역사성으로나 가치가 없으며, 한글로 된 현판이야말로 세종정신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2. 같은 날, 길 건너 문화관관부 청사 앞. 박정희 바로알리기 국민모임 등에서도 나왔다. 그들 역시 이유는 다르지만 복원중인 한자 현판 대신 기존 걸려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인지도 면에 있어서도 박정희 대통령과 훈련대장 임태영은 비교도 안 될뿐더러 40년 가까이 무탈하게 걸려있던 박 대통령 현판을 내리고 이름도 생소한 훈련대장의 한문 글씨를 내걸겠다는 참여정부의 문화재청장이나 이 같이 부당한 처사를 아무 말 없이 승계하는 이명박 정부나 어처구니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3. 문화재청은 옛 광화문의 모습이 담긴 유리원판을 토대로 고종 당시 광화문 중건책임자 겸 훈련대장이었던 임태영의 현판 글씨를 복원, 단청 작업을 마무리하는 대로 현판을 달 거라고 이미 발표한 바 있으며 아직 새로운 소리는 없다.
이렇게 3갈래로 엇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40년 동안 광화문 현판이 걸려 있었는 데 왜 바꿔 단다는 걸까? 그리고 바꿔 단다면 그 기준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할까.
박정희 정권 당시 콘크리트 구조물로 축조된 광화문을 참여정부 시절 원래 형태인 목조로 복원하려고 공사를 시작하고 이명박 정부에서 완공을 앞두고 있다. 그 일은 잘했다. 문제는 현판이다. 이 문제로 2005년 당시 국회의원 김형오 의원과 친구이기도 한 유홍준 문화재 청장 사이에 오고 간 공개 편지는 화제가 되었다.
광화문 현판과 관련하여 처음에 정조체가 거론되었다. 그런데 광화문과 관련 없는 정조체 현판이냐는 반론이 나왔다. 박정희 지우기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그래서 문화재청에서 들고 나온 것이 '원형복원'을 명분으로 1865년 고종때 경복궁 중건 당시 중건책임자 겸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로 한다는 안이다.
어쨌던 결국은 정조체도 아니요 박정희 체도 아닌 임태영체로 가고 말았다. 고종 당시 광화문 중건책임자 겸 훈련대장체를 현판복원체로 삼아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은 명쾌하지 못하다. 이는 정치성을 빼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편협하고 닫힌 사고로 볼 수밖에 없다. 말은 정치적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디 세상에 정치하고 무관한 일이 어디 있기는 한가?
광화문 현판을 새로 복원하면서 '한글 현판'으로 하자는 데 반대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한자 애호가들? 문화재 전문위원들? 모름지기 이 분들도 국민들의 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염원을 담자는 큰 뜻에는 달리 할 말이 없을거다. 그렇다면 여론을 한 번쯤 들어보는 것도 나쁠 게 없고 며칠 남지 않은 광복절에 서둘러 달 일도 아니다.
한글이 갖는 창의성, 광화문이 갖는 상징성, 역사의 흐름에 따른 시대정신을 존종한다면 한글이라고 해서 문제 삼을 일은 없다. 정치성을 세탁하려다, 정작 고려해야 할 시대정신 마저 빠지고 창조성도 빠지고, 얼빠진 현판이 되고 말았다. 낡은 것을 보수하면서 있던 한글 현판을 되살려 쓴다면 참을 만 하다. 하지만 완전히 새롭게 복원하는 일이라면 복원 기준을 바로 잡는 일이 먼저 할 일 아닌가? 한글이냐 한자냐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앞서 새로움과 시대정신, 상징성 따위를 두루 만족 시켜야 함은 초등학생도 알만한 기준이다.
그 옛날, 훈련대장 임태영 복원체는 창조성과 시대정신 마저 빠진 최악의 짝퉁 복원에 지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기준에 따라 복원을 생각한다면 쉽게 다다를 수 있는 글씨체는 우리글 훈민정음체 아닌가. 2005년 훈민정음도 고려했으나 집자에 실패하였다 하는 데, 집자에 문제가 있다면 서예가의 글씨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상징성, 창조성, 시대성 뿐 아니라 조형성, 예술성까지 두루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글이 가진 과학성과 아름다움을 이미 광화문 현판으로 올렸다는 점은 우리시대 지울 수 없는 정신이며 내리기 힘든 자부심이다.
나라를 상징하는, 서울, 한 가운데, 세종대왕 뒤, 광화문에 자랑스러운 한글 현판 하나, 대표적으로, 상징적으로 달아야 한다는 일이 수 많은 사람이 목소리 높여 온 몸으로 저항해야만 풀릴 일인가?
<참고자료> 광화문 현판 관련 (2005년) 김형오, 유홍준 공개서신 내용
유홍준 문화재 청장께 |
... 이번 '광화문 현판' 사건은 사실 좀 의외였습니다. 처음에는 현판을 바꿔야하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겠지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몇 일 동안 신문보도를 보고 이게 아닌 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되었습니다.
유청장, 정말 다가오는 광복절 날 '광화문' 현판을 교체하려고 합니까. 국민들은 많은 의문을 표시합니다. 왜 하필 이때냐는 것입니다. 광화문을 새로 축조한 것도 아니고 원형대로 복구한 것도 아닌데 유독 현판을 왜 바꾸려하는지 선뜻 이해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 대로중앙의 랜드마크나 다름없는 광화문 현판을 갑작스럽게 바꿔치기 하려는 의도에 대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왜 하필이면 광화문과 별로 관계도 없는 정조(正祖)글씨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해서 '억지 현판'을 걸겠다는 발상은 별로 문화스럽지 못하다는 지적입니다. 물론 유 청장이 노대통령을 정조로 비유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일부의 주장에 저는 동조하고 싶지 않습니다.
유 청장은 대학교 때부터 군사문화의 잔재를 두드러기 날 정도로 싫어했던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소위 국적불명의 문화재 복원, 획일화된 '이발소 그림' 같은 행정을 강하게 비판하곤 했지요. 그렇다고 한글 '광화문' 현판을 내려야 하는지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든 그 글씨가 누구의 것이든 '광화문' 현판은 현재의 광화문 건물의 중건과 함께 버젓이 걸렸고 30년 이상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울의 문패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역대 대통령들이 문화재나 신축청사 등의 현판이나 머릿돌을 자기가 직접 써서 다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학생 때도 싫어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의 대통령은 이런 짓 제발 안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싫든 좋든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이고 실체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든 자랑스런 역사가 있는 반면 숨기고 싶은 역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숨기고 싶은 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후손들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지난 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중앙청을 허물겠다고 했을 때 저는 비록 여당의원이었지만 공개적으로 안 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중앙청이 일제시대의 착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또한 광복의 상징이요,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역사적 현장이자 6·25전쟁 중 서울 수복의 감격이 서린 건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건물은 깡그리 없어졌습니다. 조선총독부 건물만이 아니라 중앙청도 함께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광화문' 현판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군정종식을 외쳤던 YS조차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중심대로의 현판은 살려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 청장이 광화문 현판을 내린다고 하니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광화문'의 한글 현판은 당시로서 매우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원상복구 현판도 아닌 정조의 글씨로 집자해서 '가짜현판'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반역사적 발상이 아닌지 두렵기조차 합니다. 나름대로 그 현판에는 그 시대의 정신과 아픔이 녹아있는데 이를 외면하고 과거의 형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역사의 회복은 아닐 것입니다.
유 청장, 이제 냉정히 우리 역사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잘한 것은 잘한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평가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승자에 의한 역사파괴는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사랑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승자에 의한 역사왜곡이 만연해있기 때문 아닐까요.
최근 부상하고 있는 과거사 문제는 정치권의 회오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재 관리는 현재의 정치적 이슈에서 한발 물러나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 고고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산이 강을 넘지 못하듯 인간 또한 역사의 강을 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광복 60주년이 되는 그날, '광화문' 앞에서 유청장의 살아 숨쉬는 역사 강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과욕은 아니겠지요. 소식기다리겠습니다.
2005. 1. 26.
국회의원 김형오 |
김형오 의원에게! |
... 첫째 광화문 현판 교체는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1995년 경복궁 복원 계획 속에 들어 있던 것으로 2003년도 공청회도 거친 사항입니다. 다만 그것이 "뜨거운 감자"여서 누구도 잘 건드리지 않고 미루어져 온 사안입니다.
그런데 올 8.15 광복 60주년 행사가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서 열리게 될 예정이어서 불가피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왜 정조글씨냐는 정말 오해입니다. 정조글씨로 교체하는 것은 여러 안(案) 중 하나입니다. 광화문의 옛 현판이 없으므로 고궁(故宮)의 격에 맞추려면 ①현역 대표 서예가의 글씨, ②조선왕조의 대표적 서예가의 글씨 집자 ③임금님 글씨 즉 어필(御筆) 중 하나 등 세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중 현역 대표 서예가는 여초 김응현 선생인데 현재 병중에 계시고, 명필 글씨는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 글씨를 집자해 만들고 있습니다. 어필이 문제인데, 아시다시피 임금님들은 글씨를 많이 남기지 않아 光化門 세글자의 집자 가능한 분은 정조대왕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훈민정음 집자도 고려했으나 집자에 실패하였습니다. 정조는 경복궁과 인연이 없으나 조선왕조의 명군(名君)이고 글씨도 품격이 있어 어필 안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화문 새 현판은 이상의 3가지안(한석봉 집자, 추사체 집자, 어필(정조)집자)를 갖고 오는 3월 문화재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심의하여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언론은 내가 노 대통령을 정조와 비교했던 일을 연상하며 나를 '아부쟁이' 내지 '어용학자'로 몰고 있습니다마는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노 대통령에게 정조를 말한 것도 참여정부가 개혁을 기치로 내걸면서 정조 같은 역사적 사례(실패까지 포함)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진짜 개혁을 하시려면 정조를 통해 개혁을 배우십시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관계 저서까지 사서 보낸 것입니다.
김형오 의원! 아시다시피 내가 누구에게 아부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걸 할 줄 몰라 길바닥에서 10여년을 백수로 지낸 시절이 있음을 잘 알지 않습니까.
또 내가 뭐가 아쉬워서 대통령에게 아부를 합니까. 아부를 하려면 대통령이 내게 일 잘해달라고 부탁을 해야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광화문을 "대표적인 중심대로의 현판"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와의 시각 차이는 여기서 생긴 것 같습니다. 광화문은 정확히 말해서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정문(正門)입니다. 결코 대로변의 현판이 아닙니다. 즉 경복궁의 얼굴입니다.
경복궁의 복원은 2009년까지 약 45% 복원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하나씩 할 수 있는 일을 다하여 지금은 대장금이 근무했던 소주방을 복원하고 있고 경회루의 보조 울담도 쌓고 있습니다.
그런 복원계획의 일환입니다. 저는 경복궁 복원을 책임 맡고 있는 문화재청장으로서 마땅히 할 일. 이미 결정해 놓고 그동안 미루어 온 일을 광복 60주년 행사장 관리인으로서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끝으로 "어떤 경우라도 승자에 의한 역사파괴는 막아야 한다."는 김 의원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광화문은 결코 그런 맥락에서 볼 사안이 아닙니다.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는 아산 현충사, 이것은 이순신 장군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입니다. 저는 이곳을 손보거나 현판을 떼내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아산 현충사에 이런 일을 했다면 그것은 씻지 못할 과오이고, 서투른 정치적 행위이며, 승자에 의한 역사파괴 작업이 된 지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김 의원! 광화문과 현충사는 다릅니다. 광화문은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입니다.
...
2005.1.27
문화재청장 유홍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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