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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른 밥집에서 벽마다 온통 스케치북에다가 쓴 일기를 붙여놓은 걸 봤습니다. 밥집을 꾸리면서 날마다 일기를 쓰며 하루 하루 뜻 깊게 살아가는 '서늠이' 아주머니 이야기 한 번 들어보세요.
▲ 날마다 스케치북에 일기를 쓰는 서늠이(59) 씨 우연히 들른 밥집에서 벽마다 온통 스케치북에다가 쓴 일기를 붙여놓은 걸 봤습니다. 밥집을 꾸리면서 날마다 일기를 쓰며 하루 하루 뜻 깊게 살아가는 '서늠이' 아주머니 이야기 한 번 들어보세요.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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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저것 좀 봐! 이거 이 아지매가 다 썼나봐?"
"와, 아지매 대단하시네."
"아지매, 저거 아지매가 다 쓰신 거예요?"
"저기 가봐. 저기 방에 가면 더 많아."

의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길을 나선 우리는 부지런히 자전거를 타고 달렸어요. 이른 아침에 보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동무삼아 시원하게 달려온 곳이 바로 군위군 우보면이었어요. 이곳은 의성을 오가는 길에 자주 다녔던 길이라서 매우 익숙하답니다. 조금은 늦은 아침밥을 먹으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는데, 밥집 앞에서 푸성귀를 다듬고 있던 아주머니가 우리를 부르네요. 아침밥 맛있게 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이 밥집은 중국밥집이네요.

중국음식이라면 언뜻 자장면이나 짬뽕 같은 국수 종류만 생각나는데, 아주머니가 밥을 해주시겠다는 소리에 이끌려 들어갔어요. 자전거를 바깥에 세워두려고 하자, 한사코 안에다가 들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자전거야 그리 비싼 자전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든지 가서 밥집에 들어갈 땐, 몹시 마음이 쓰이는 건 사실이랍니다. 우리 부부한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발이니까요.

"우리 집에 잔차 타고 오는 사람들 많아서 내가 잘 알아. 다들 비싼 자전거라고 안에다가  들여놓던데? 밥 먹는데 괜히 마음 불안하면 안 되니까 안에다 들여요. 난 괜찮으니까…."


아침마다 일기 쓰는 아지매


사는 일이 힘들지만, 그래도 언제나 즐겁게 살아가자고 늘 다짐을 합니다. 글 속에 '동생들'은 서늠이 아주머니를 도와 밥집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을 말한답니다.
▲ 일기 속에 삶이 담겨 있어요. 사는 일이 힘들지만, 그래도 언제나 즐겁게 살아가자고 늘 다짐을 합니다. 글 속에 '동생들'은 서늠이 아주머니를 도와 밥집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을 말한답니다.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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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갑게 맞이해주는 것도 기분 좋은데, 이렇듯 자전거 타는 사람 마음까지 헤아려주니 무척이나 흐뭇했지요. 짬뽕밥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 밥집 분위기가 참 묘합니다. 벽마다 커다란 종이가 아무렇게나 덕지덕지 붙어있는데, 자세히 보니, 달력종이 같기도 하고 도화지 같기도 한 종이에다가 삐뚤삐뚤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어요. 게다가 종이마다 날짜가 모두 적혀있는데, 바로 며칠 앞서 쓴 글도 있더군요. 그리고 글마다 '서늠이'라는 이름 석 자가 빠지지 않고 적혀있는데, 몹시 궁금했어요.

궁금한 마음에 묻는데, 이 아지매는 대답 대신 덮어놓고 방안에 들어가 보라고 하시네요. 아무리 그래도 낯모르는 이의 방안까지 선뜻 들어가기가 뭣했지만 뭔가가 매우 남다른 게 있을 거란 생각에 들어가서 보고는 입이 딱 벌어집니다. 방 안 벽마다 틈이 없을 만큼 아까 보았던 그런 종이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어요. 벌써 오랫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붙어 있어 빛깔이 누렇게 바랜 것들도 많았어요.

"아니, 이걸 모두 아지매가 썼단 말이에요? 와우! 대단하시네요. 어머나, 2003년에 쓴 글도 있네요?"
"2003년엔 우리 영감이 돌아가실 땐데 그때 것도 있을 거여."

벽마다 온통 아주머니가 쓴 일기 글로 가득 찬 것도 놀랍지만, 글속에 묻어나오는 그날그날 일들을 찬찬히 읽어보니 가슴 짠한 글도 많이 있더군요. 화상을 입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직도 아프다는 글도 있고, 오늘은 어떤 손님 때문에 몹시 힘들었다는 글도 있고, 또 자식들을 걱정하는 어미의 간절한 바람도 있고, 힘들어도 참되게 살자는 굳은 다짐이 적힌 글도 있었어요.

"아지매, 이런 글은 언제 쓰신대요? 밥장사하기도 힘드실 텐데…."
"아침에 눈뜨면 바로 써요. 일어나면 맨 먼저 하는 일이 일기 쓰는 거여. 글씨는 삐뚤빼뚤하고 안 맞는 것도 많을 거여. 그래도 난 내 마음을 고대로(그대로) 쓰는 거여. 넘들이 보면 흉볼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래도 저렇게 써서 붙여놓고 나면 마음이 편해."


"나 일기 쓰라고 울 며느리가 스케치북을 사다줬어."

돌아가신 남편은 일기를 쓰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자식들은 무척이나 좋아한다시며 며느리가 사준 스케치북 이야기를 해주시고 있어요.
▲ 서늠이 아지매랑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가신 남편은 일기를 쓰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자식들은 무척이나 좋아한다시며 며느리가 사준 스케치북 이야기를 해주시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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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늠이 아주머니는 혼자서 중국밥집을 꾸리신답니다. 지난 2003년까지는 남편과 함께 했지만 돌아가시고난 뒤에 사람도 두고 장사를 했지만 예전만큼 장사가 되지 않아 혼자서 꾸리면서 욕심내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시네요. 때때로 마을 사람들이 와서 일도 거들어 주신다는데, 누구든지 먼저 오는 사람이 알아서 일을 시작한대요. 나물도 다듬고 청소도 하고 그렇게 아주머니 일을 도와주면 고마워서 푼돈이지만 용돈이라도 하라고 얼마쯤 쥐어주신다고 합니다.

벌써 이렇게 일기를 써온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남편이 살아계실 때엔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거 써서 뭐 할 거냐며 나무라셔서 몰래 숨어서 글을 쓰기도 했대요.

"영감 돌아가시고 나니까 내 맘대로 글 쓸 수 있어 좋아요. 난 이게 낙인데 말이여."
"글을 보니까 자식 걱정하고 손자들 예쁘다는 글이 많이 있네요?"
"내가 딸 셋에 아들이 하난데, 손자들이 일곱이나 되여 그중에 쌍둥이들도 있는데, 어찌나 귀엽고 예쁜지 몰라."
"그래 자녀들은 아지매 이렇게 글 쓰는 거 좋아하세요?"
"암, 좋아하고말고. 여기 봐. 저거 죄다 우리 며느리가 사다줬어."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스케치북이 여러 권이 쌓여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벽에 붙은 종이가 모두 스케치북이었던 거였어요. 어머니가 커다란 종이에다가 일기를 쓰는 걸 알고 한 장씩 뜯어서 쓰라고 사놓은 거라고 합니다.

몇 해 앞서 '시 쓰는 밥집 할아버지'라는 제목으로 기사로도 소개했던 용천수 할아버지가 생각났어요. 그때 그 할아버지는 공책마다 빼곡하게 시를 써서 하나 둘 보관해 두었던 게 무척이나 많았었지요.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스케치북에다가 일기를 쓰시네요. 참 재미나게 사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혼자 밥집을 꾸리며 살아가는 '서늠이' 아주머니는 날마다 스케치북에 일기를 쓰면서 세상살이 힘겨운 시름을 잊고 산다고 합니다. 혼자 살다 보니, 때때로 지치고 속상할 때도 많이 있지만 이렇게 글을 써서 벽에 붙이고 나면 힘든 일도 싹 다 잊을 수 있다고 합니다. 쓴 글을 하나하나 다시 읽으면서 화가 나고 속상했던 일들도 어느새 눈 녹듯이 마음이 풀린다고 하시네요. 어쩌면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면서 살아가는 일에 용기도 얻곤 하는 듯했어요.

똑 같은 과자 꾸러미를 일곱 개나 마련해두셨어요. 낼모레 아주머니 생신 때에 맞춰 온다는 일곱 손자들에게 주려고 하나씩 따로 마련하셨답니다.
▲ 손자들 주려고 마련해두신 과자 꾸러미 똑 같은 과자 꾸러미를 일곱 개나 마련해두셨어요. 낼모레 아주머니 생신 때에 맞춰 온다는 일곱 손자들에게 주려고 하나씩 따로 마련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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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일 모레면 내 생일인데, 그땐 우리 아들 딸 손자들이 모두 온다고 했거든 그러면  '빙계계곡'에서 실컷 놀다가 올 거여. 내가 그때 우리 손자 손녀들 줄라고 과자를 하나씩 다 사놨지."

하시며 벽을 가리키는데, 웬 주머니가 7개가 걸려 있었어요. 그게 모두 일곱 손자들한테 주려고 미리 하나씩 준비해둔 과자 꾸러미라고 하네요. 아주머니가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엿보여 가슴이 짠했답니다.

"아지매, 나도 종이 한 장 줘봐요. 여기 온 것도 인연인데, 글 한 줄 남겨놓고 갈게요."

라고 말했더니, 아이고 이런 고마울 데가 있냐면서 스케치북 한 장을 북 찢어주십니다. 짧은 글과 함께 아주머니가 늘 건강하고 재미나게 사시라고 써서 드렸더니, 곧바로 벽에다가 갖다 붙이십니다.

"내가 이거 여기 붙여놓고 두고두고 자랑해야지!"

하시면서 말이지요. 아들 낳겠다고 어머니가 이름까지 머슴아 이름으로 지어줘서 '늠이'가 되었다는 서늠이 아지매, 이름도 남다르지만 이분의 삶도 퍽 남다르시네요. '하루하루 살면서 우짜든지 재미나게 사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씀하시며 우리한테도 늘 건강하고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라며 인사를 건네시는 아주머니를 뒤로 하고 또 길을 나섭니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 언제까지라도 날마다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스케치북에다가 일기를 쓰면서 하루하루를 맞이하겠지요? 어쩌면 다음에 갔을 땐, 우리 부부를 만난 이야기를 스케치북에 써서 붙여놓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서늠이 아주머니, 늘 몸 튼튼하게 보살피시고 글도 재미나게 쓰세요."

왔다간 기념으로 글 한 줄 남겨드리려고 말했더니, 귀한 스케치북 한 장을 북 찢어주십니다. 내가 써드린 글을 벽에다가 붙여놓고 두고두고 자랑하겠다고 하시네요. 아마도 다음에 찾아가면, 우리를 만난 얘기를 일기로 써서 붙여놓았을지도 모르겠네요.
▲ 나도 글 한 줄 남기고... 왔다간 기념으로 글 한 줄 남겨드리려고 말했더니, 귀한 스케치북 한 장을 북 찢어주십니다. 내가 써드린 글을 벽에다가 붙여놓고 두고두고 자랑하겠다고 하시네요. 아마도 다음에 찾아가면, 우리를 만난 얘기를 일기로 써서 붙여놓았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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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서늠이 씨는 경북 군위군 우보면에서 '대중식당'이라는 중국밥집을 꾸리는 분이랍니다.



태그:#일기, #스케치북에 쓰는 일기, #우보 대중식당, #자전거, #서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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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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