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에르 드 발롱브뢰즈(Pierre de Vallombreuse),
<토박이 겨레(PEUPLES)>(Flammarion,2006)
책이라는 문화와 사회와 삶을 놓고 돌아볼 때에, 우리하고 이웃한 일본이라는 나라는 온누리에 손꼽힙니다. 책에다가 사진이라는 문화와 사회와 삶을 함께 얹어서 헤아릴 때에, 우리 옆나라 일본은 온누리에서 으뜸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손꼽히고 으뜸가는 이웃나라가 있으나, 이 이웃나라하고 책이나 사진을 놓고 문화나 사회나 삶을 살뜰하게 나누지 못합니다.
온누리에 손꼽힐 뿐 아니라 으뜸간다 할 만한 이웃나라 일본이라지만,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훨씬 앞서 '책이 안 팔린다'는 소리가 불거졌습니다. 일본에서 '책이 안 팔리'고 '책을 많이 못 만든다'고 하는 이야기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리로서는 참 배부른(?) 소리 같습니다만, 이제껏 훌륭한 책나라요 드높은 사진나라로 이어오던 일본에서 책이든 사진이든 사진책이든 알뜰살뜰 일구지 못한다면 이 나라로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을 이야기할 까닭 없이 한국땅을 돌아본다면, 참 슬프고 걱정스러우며 끔찍하다 할 만큼 책과 사진하고 얽힌 문화와 사회와 삶이 엉망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엉터리입니다. 아이들은 어린 나날부터 갖가지 '예비 대학 입시 공부'를 합니다. 아이들한테 가르친다는 영어는 참다운 영어가 아니라 대학 입시를 미리 살피는 영어입니다. 아이들 꿈과 넋을 살찌우는 영어나 한자나 지식이나 상식이나 책읽기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수많은 학원을 아주 오랫동안 다니지만, 머리와 마음과 가슴에 지식조각만 들어찹니다. 지식을 슬기로 녹여내면서 아이들마다 다 다른 넋과 꿈을 살찌우는 가운데 아름다이 살아갈 무지개빛을 영글지 못합니다.
그래, 참 엉망이요 엉망진창이며 엉터리인 한국입니다. 우리는 우리 터전이 얼마나 엉망이고 엉망진창이며 엉터리인 줄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얼마나 엉망인 줄 알아야 참다운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할는지를 찾을 수 있고, 어느 만큼 엉망진창인 줄 느껴야 착하고 바른 길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가를 톺아볼 수 있으며, 왜 엉터리인지 깨달아야 곱고 맑은 길을 힘차게 걸어갈 기운을 북돋웁니다.
책과 사진과 사진책으로 우리 아이들과 우리 터전과 일본 사람들과 일본 책마을을 곱씹어 봅니다. 우리 나라에서 책은 참말 적게 읽힐 뿐 아니라 적게 나옵니다. 읽혀야 할 책이 제대로 읽히지 못하고, 나와야 할 책이 제때 제대로 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팔리는 책은 곧잘 팔릴 뿐 아니라, 어떤 책은 어마어마하게 팔립니다. 몇 가지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고 있는 출판사가 '책으로 엄청나게 번 돈'으로 '팔림새는 떨어질는지 모르나 책마을을 살찌울 아름답고 알찬 책'을 만드는 데에는 돈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책다운 책을 알아보는 사람은 늘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많지 않을 뿐더러, 이들이 책을 잘 알아보고 사 준다 한들 출판사로서는 크게 돈벌이를 하기 힘들기까지 합니다만, 사진다운 사진을 굽어살피며 사진을 즐기거나 사진을 껴안는 사람은 노상 있습니다. 사진책다운 사진책을 장만하는 데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사람은 한결같이 있습니다. 다만, 일본에서 이러한 사람이 퍽 줄었고, 한국에서는 예나 이제나 거의 없다뿐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예나 이제나 거의 없다시피 할지라도 아예 없지 않습니다. 적잖이 있고 쏠쏠히 있습니다.
저는 지난 1998년에 처음으로 사진기를 쥐어 '헌책방'이라는 곳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틀림없이 있는' 아름다운 손길을 믿었습니다. 저 스스로 제 사진감인 헌책방을 알차고 아름다우며 알맞게 사진으로 담아내어 이야기 하나 엮어 놓는다면, 이 아름다운 손길은 틀림없이 제 사진을 사랑해 주고 아껴 주리라 믿었습니다. 다만, 이 아름다운 손길만으로는 제가 내놓을 사진책이 1000권 첫판이든 2000권 첫판이든 3000권 첫판이든 열 해에 걸쳐 다 팔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문 다섯 사람이든 쉰 사람이든 오백 사람이든 아름다운 손길을 믿고 있기 때문에 사진을 찍고 사진책을 낼 꿈을 키웁니다. 오백 사람은커녕 쉰 사람조차 아닌 다섯 사람마저 아니라 한다면, 저 스스로 이 일 저 일 땀흘려 해서 책값을 벌어 모은 다음 사진책 하나 내놓고, 사진책을 찍은 부수만큼 둘레 사람들한테 선물해 주면서 '내 사진책은 기꺼이 사서 읽지 않아 주었을지라도, 내 사진책 아닌 다른 분들 좋은 사진책은 제대로 알아보고 사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씨앗을 뿌립니다.
책을 꼭 많이 팔아야 하지 않으며, 사진을 꼭 목돈 받고 팔아야 하지 않습니다. 책이란 제대로 읽혀야 하고, 사진이란 제대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 즐겁게 읽은 책이면 넉넉하고, 나 스스로 뿌듯하며 보람차게 일군 책이면 아름답습니다. 나 스스로 즐겁게 곰삭이는 사진이면 푸지고, 나 스스로 신나며 기쁘게 찍은 사진이면 거룩합니다.
프랑스 바욘(Bayonne)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사진길을 걷는 피에르 드 발롱브뢰즈(Pierre de Vallombreuse) 님이 일군 사진책 <토박이 겨레(PEUPLES)>를 읽습니다. 프랑스말은 할 줄 모를 뿐더러 프랑스땅을 밟은 적조차 없으나, 이 좋은 사진책을 서울 홍제동에 자리한 헌책방 〈대양서점〉에서 고맙게 만나 기쁘게 읽습니다. 이분은 어떤 마음으로 사진길을 걸었는가를 헤아리니 더없이 고맙게 읽을 사진책으로 자리잡습니다. 이분은 어떠한 매무새로 사진삶을 일구나를 곱씹으며 그지없이 기쁘게 품에 안을 사진책으로 남습니다. 이분은 어떠한 눈길로 사진틀을 이루는가를 살피니 참으로 반갑게 마주할 사진책으로 느낍니다.
슬픈 눈짓이든 기쁜 몸짓이든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줄 아는 가슴으로 사람들 사진 하나 담을 수 있으면, 수백 수천 수만 장이 아닌 열 몇 장이나 한두 장 사진으로 얼마든지 빛나는 사진책 하나 영글어 놓을 수 있습니다. 고단한 일이든 신나는 놀이이든 고스란히 맞아들일 줄 아는 마음바탕으로 사람들 사진 하나 찍을 수 있다면, 스무 해나 서른 해에 걸쳐 수십 수백만 장에 이르는 사진이 아닌 한두 해나 서너 해에 걸쳐 수십 수백 장에 그치는 사진으로 얼마든지 해맑은 사진책 하나 빚어 놓을 수 있습니다.
<토박이 겨레(PEUPLES)>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일구어 가는 흐름을 딱히 따스하게라든지 굳이 차분하게라든지 하는 금을 긋지 않으면서 바라보는 눈길로 담은 사진을 보여줍니다. 누구를 탓한다든지 무슨 목소리를 내뱉는다든지 하는 사진이 아니요, 사진쟁이하고 사진에 찍히는 사람 누구나 아름다운 목숨결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느끼도록 이끄는 사진을 선보입니다.
도드라져 보이고자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남달라 보이려고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어느 겨레 어느 삶을 내 손으로 '역사'나 '기록'이라는 이름을 내걸며 만들어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은 나와 네가 어우러지는 이야기인 문화입니다. 사진은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빚는 예술입니다. 사진은 나부터 나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려고 내 몸과 마음을 보듬는 삶입니다. 사진 하나로 아름다울 길을 살피고, 사진 하나로 사랑스러울 자리를 돌아보며, 사진 하나로 참될 뜻을 보살핍니다.
다큐멘터리라는 갈래로 사진을 찍고자 하는 분들은 아무쪼록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에 앞서 '사람'과 '사랑'과 '삶'을 아리땁고 부드러이 어루만지는 눈빛과 몸빛과 손빛을 가다듬어 주면 좋겠습니다. 일과 문화와 삶과 사람이 만나는 곳을 먼저 들여다보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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