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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새 월화드라마 <나는 전설이다>.
SBS 새 월화드라마 <나는 전설이다>. ⓒ SBS

신데렐라가 말했다.
"그땐, 당신도 나 좋아했잖아."
왕자님이 말했다.
"결혼할 마음까진 없었어."

아아, 그래. 이건 좀, 비극이다.

우리는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맺어진 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관심도 없고. '그리하여 그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마지막 문장을 보며 뿌듯한 마음에 책을 덮어버렸을 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신데렐라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부부싸움도 하지 않고 고부갈등도 없었을까? 만약 그녀가 왕가의 대를 잇는 후사를 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들은 행복했을까?

SBS 새 월화드라마 <나는 전설이다>(매주 월화 오후 9시)의 초반부는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결혼한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한다. 법조명문가의 맏며느리이자 대한민국 최고 로펌의 최연소 대표변호사를 남편으로 둔 전설희(김정은 분)는 남부러울 것 없는 여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한 로펌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임신했다. 그리고 결혼했다.

그러나 아이가 유산되고 신데렐라의 인생은 비탄에 잠기게 된다. 사람들은 앞에서는 허리를 숙이지만 뒤에서는 손가락질을 하고, 시어머니는 "우리 집에 네가 해줄 게 그것밖에 더 있겠니? 애 가진 유세로 우리 집에 들어왔으니"라며 그녀에게 임신을 종용한다. 좋다는 건 다 먹고, 불임클리닉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그러나 그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건 남편과의 소원한 관계 때문이다.

그녀의 왕자님, 차지욱(김승수 분)은 실수를 용납 못하는 사람이다. 실수를 용납하지 못해 사귀던 전설희가 임신하자 결혼했고, 실수를 용납하지 못해 그녀와 남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이혼하지 않는다. "나 실수 안 하는 거 알지? 내 인생 딱 한 번 실수, 그게 너야." 왕자님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다.

'신데렐라' 설희는 왜 부잣집 문을 박차고 나왔을까

 왕자님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다.
왕자님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다. ⓒ SBS 화면캡쳐

마침내 그녀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고 더 이상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할 수 없게 됐을 때, 설희는 시댁 식구들 앞에서 이혼선언을 한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폐기처분해 가슴 속 어딘가에 조용히 숨겨뒀던 밴드활동의 꿈을 구체적으로 꾸는 한편, 최고의 변호사로 손꼽히는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준비한다. 나이든 아줌마 신데렐라의 자아 찾기, <나는 전설이다>는 그것을 그리는 드라마다.

그러나 <나는 전설이다>는 단순히 이혼한 아줌마의 자아 찾기 성공기만은 아니다. 그와 동시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을 등장시켜 그들을 통해 갈등구조를 그려내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기존의 줌마렐라 드라마가 주로 개인과 개인의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나는 전설이다>는 계급과 계급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극중 등장하는 두 집단, 지욱의 집안과 '마돈나 밴드'를 통해서.

지욱의 집안은 이름 있는 법조인 가문, 그야말로 명문가다. 반면 마돈나 밴드의 구성원들은 어떤가. 화자(홍지민 분)는 건강식품 영업사원이고, 수인(장신영 분)은 가난한 연예기획사 매니저다. 란희(고은미 분)는 한물 간 퇴물가수고, 아름(쥬니 분)은 가난한 '리틀 맘'이다. 멤버들의 면면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쩌리'들의 모임이다.

드라마는 이 두 집단의 갈등을 그려내면서 '부와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설희 부부는 이미 부부로서의 기능도, 의미도 잃어버린 지 오래. 하지만 화자 부부는 비록 넉넉한 삶을 아니지만 언제나 깨가 쏟아지는 행복한 삶을 산다. 지욱의 집안은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공간이지만, 마돈나 밴드는 언제나 따뜻한 정과 의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마돈나 밴드'의 첫 공연 장소가 시장 한가운데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를 더한다. 그럴싸한 라이브 카페나 공연장이 아닌, 서민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시장에서의 첫 공연, 그리고 그런 곳임에도 흥겹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마돈나 밴드'의 모습에서 그들의 정체성은 뚜렷해진다. 그들은 음악을 통해 힘없고 가난하지만 음악에 즐거워할 줄 아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건 아닐까.

명분 있는 악역을 그려낸 <나는 전설이다>

 '마돈나 밴드'의 첫 공연장소는 다름 아닌 시장 한복판이었다.
'마돈나 밴드'의 첫 공연장소는 다름 아닌 시장 한복판이었다. ⓒ SBS 화면캡쳐

<나는 전설이다>가 가진 미덕은 서로 다른 두 집단을 동시에 그려내면서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선이 가득한 상류층과 정이 넘치는 서민층을 그려내는 드라마에서 선과 악을 가르는 일은 너무나 쉽다. 그리고 악역이 된 상류층은 대개 특별한 이유도, 뚜렷한 명분도 없이 그저 악역이기 위해 악행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악역은 태어날 때부터 악역이며, 자연 그들의 행동은 설득력을 잃는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악역인 지욱과 그 집안 식구들의 행동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때문에 억지스럽지 않다. 지욱은 어린 나이에 로펌의 대표변호사가 됐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야심가다. 그는 정계에 진출하고 싶어하고, 그런 그에게 '계급을 뛰어넘는 아내와의 로맨스 에피소드'는 매우 훌륭한 홍보수단이다. 그가 설희의 이혼선언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단순한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빠른 전개와 짜임새 있는 구조,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나는 전설이다>는 방송 2회 만에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천사의 유혹> 이후 쭉 별다른 반응 없이 침체일로를 걸었던 SBS 9시 월화드라마 시장에 모처럼만에 파문을 일으킨 줌마렐라 드라마 <나는 전설이다>는 '전설'이 될 수 있을까?


#나는전설이다#줌마렐라#김정은#김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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