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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이스토리3>의 한 장면.
 영화 <토이스토리3>의 한 장면.
ⓒ 픽사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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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내용이 있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것에 비해 어렵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동들이 보는 것이니만큼 잔재미에 치중하고 강제적인 해피엔딩이 필요하기도 한 데다, 이런 구조를 관통해 시사적 내용을 담은 다음 영화를 보는 대상을 만족시킬 만한 작품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것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동심을 자극하는 창작물 혹은 고전 동화를 리메이크 한 작품들에서 이런 경향이 드러난다.

그러나 최근 개봉한 <토이스토리3>은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작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돌아올 수 없는 먼 미래로 떠난 앤디와 그러한 앤디에게서 버려짐을 느끼는 낡은 장난감들 사이의 애정과 의리라는 식상한 소재를 '해피엔딩'이라는 전형적 틀에서 다루면서도 곁가지를 통하여 시사적인 내용까지 제공해 주는, 쉽게 보기 어려운 웰메이드 작품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간만에 '물건'이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평론'인데, 많은 글들이 그저 '동심'과 '이별', '감동'에 치중해 있어 조금은 손발이 오그라든다.

분명히 <토이스토리3>는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저 겉에 보이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이해해버리는 자칭 '프로페셔널'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보내며 본격적으로 <토이스토리3>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어라, <토이스토리3>...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긴데?

영화 <토이스토리3>의 한 장면
 영화 <토이스토리3>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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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작품의 시작은 절망적이다. 주인공 장난감들의 주인인 앤디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나이가 나이인 만큼 더 이상 장난감들과 놀지 않는다. 더 이상 놀아주는 이 없는 집, 결국 장난감들은 앤디의 집을 떠나, Sunny side라는 이름의 한 보육원에 도착하고, 랏쏘라는 이름의 딸기향이 나는 곰인형의 환대를 받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곳은 놀아 줄 아이들이 많고, 게다가 주 5일제 근무라서, 2일은 장난감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는 최고최적의 환경인 곳이다.

앤디의 장난감들은 Sunny side에서 보육되는 영아기 아이들이 지내는 방에 배속받는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노는 방식은 지극히도 파괴적이라서 이들은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는다. 때문에 버즈는 랏쏘에게 방을 바꿔달라고 찾아가지만, 랏쏘는 오히려 버즈를 잡아 포맷시켜 자신들의 충직한 개로 만든 후, 버즈를 이용해 다른 장난감들을 탄압한다. 그리고 말한다. "Sunny side는 평등한 곳이다, 너희들이 많은 시간 노력을 한다면, 좋은 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결국, 버즈를 제외한 앤디의 장난감들에게 허락된 장소는 Sunny side의 Shady Place인 것이다.

어라, 그런데 이 장면,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다. 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역사에서 말이다. <토이스토리3>에서 초기 Sunny side가 보이는 세계는 분명 만인이 평등한 사회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Sunny side의 안락함을 즐기고 있는 것은 랏쏘와 그 추종세력들 뿐이다. 어디에서 많이 보지 않았나? 그렇다.

Sunny side가 대표하고 있는 세력은 소련인 것이 분명하다. 랏쏘는 '곰'이다. 그리고 소련을 상징하는 동물 또한 '곰'이었다. 그리고 랏쏘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망치처럼 생겼다. 이 또한 공산주의 국가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를 닮아있다. 게다가, 랏쏘와 그 추종자들의 안락한 생활과 달리 Sunny side를 이루는 많은 장난감들은 '개만도 못한'생활환경에서 그저 열심히 일만 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소련의 지도세력과 인민의 생활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최초로 랏쏘를 비판하는 내부세력인 켄은 느끼한 외모와 '평등한 후기 Sunny side'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옐친을 닮았고, 랏쏘를 쓰레기통에 던지는 우는 아이 인형은 대머리라는 점과 실질적으로 랏쏘를 밀어낸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를 닮아있다.

자본주의를 통렬히 씹어버리는 성인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스토리3>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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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토이스토리3>는 단순히 구세계 역사에 대한 반복으로 독재의 위험성을 관객에게 일깨워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Sunny side의 생활은 자본주의 사회와도 밀접하게 닮아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은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일하는 것과 직접적인 행복은 크게 연관되지 않는다. 자신들이 피를 토하면서 일한 결과물은 어딘가에 존재할 사회 상층부의 부를 축적시키는 데 대부분이 사용되며,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지도층은 그 결과물을 '기꺼이' 사회구성원들과 '나눈다'.

물론, 그 나눔에 있어서 대부분의 부가 상층부에게 축적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Sunny side의 구성원들은 일주일에 5일간, 아이들과 놀아주며 이틀간의 휴식시간을 갖는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일반화되어있는 주5일 근무체계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5일간 '아이들(자본)'에게 시달리고, '랏쏘와 패거리(지도층)'에게 억압당한 후 겨우 이틀이라는 시간만 자유로울 수 있는 현대 자본주의인들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이 가능하다는 것은, 랏쏘의 대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앞서 나온 것처럼 탈출하려는 앤디의 장난감들에게 랏쏘는 "Sunnyside는 평등한 곳이다, 너희들도 열심히 일하면 우리처럼 안락한 곳에서 생활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회의 평등'과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균등한 기회를 얻고, 노력에 따라 합리적인 결과물을 통해 계층이동과 자아실현 및 일명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배운다'. 정작 그것이 맞는가 틀린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거의 주입식 교육에 가깝게 반복적이고 구속적으로 이러한 '기회의 평등'에 중독되어 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열심히 일한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내일의 행복'이라는 그 가련할만치 추상적인 목표를 향해, 자신의 몸이 부서지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에 대해 신경쓰고 자신을 아낄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토이스토리3>가 단순히 아동용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토이스토리3>는 아동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한 편, 그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에게 이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너는 행복하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너무나도 탁월하다. 소련을 비꼬아 역사적 학습효과를 제공한 후, 완벽히 '승리한' 체제라 믿고 있던 자본주의마저 통렬히 '씹어'버리는 연출이 말이다.

곁들여서, 마지막으로 섬뜩한 두 가지, 하나는 랏쏘의 추종세력들이 즐기는 놀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생역전의 꿈'을 안고 성행하는 인간들의 '도박'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랏쏘에게 귀순(?)한 버즈가 관리자의 직위를 맡아 그들의 세계에 너무나 충실하게 편입된다는 것이다.

완장 찬 바보들의 거들먹거리는 모습, 너무 잘 그렸다

영화 <토이스토리3>의 한 장면.
 영화 <토이스토리3>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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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아무리 순수한 리얼리스트라 하더라도 한 번 변질된다면 권력의 개가 되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조차 잊기 마련이라는 것을 <토이스토리3>는 영웅 버즈의 일시적인 몰락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이는 정작 자기 스스로는 힘이 없음에도, 힘을 가진 자들에게 그 힘을 '하사받은' '완장 찬 바보'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들의 반동인물로 등장하는 것이 주인공 '우디'다.

우디는 Sunny side에서 자신들의 친구를 데리고 도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랏쏘와 정면대결을 하게 되고, 랏쏘의 일당이었던 '켄'의 연설, 그리고 '우는 아기 인형'의 반란으로인해 일차적으로 이기게 된다. 여기서 <토이스토리3>는 아무리 강력하게 옭죄고 억압한다 하더라도, 흔히 쓰이는 '절대정신'의 각성을 통해 한 사회의 지배층의 일원에 있었다 하더라도 만인의 평화를 위한 힘을 쓰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이를 통해 억압적 사회를 붕괴시킴으로써 억압적 사회에서의 인간이 가진 힘을 긍정하고 있다.

한없이 암울하기만 했던 Sunny side의 전반기를 일거에 뒤집는 아주 좋은 반전이다. 그리고 그 이후, 랏쏘는 한없이 망가진다. 앤디의 장난감(민중)이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랏쏘는 다시 한 번 앤디의 장난감들을 골탕먹인다. 여기에서, 잘못된 지배층의 표본이 나온다. 자신이 잘못했고, 징벌받은 데 이어, 구원까지 받았음에도 정신 못 차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답이 없는 지배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현 한국의 지배층과 많이 닮아있어 유감이다.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Sunny side문제를 해결한 후, 이야기는 다시 앤디와 장난감들의 교감으로 돌아온다. 앤디는 자신에게 돌아온 장난감을 착한 아이 '보니'에게 맡긴다. 그리고 보니에게 맡기기 전, 어쩌면 자신들에게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장난감들과 신나게 논다. 그리고 말한다. "우디는 친구를 영원히 배신하지 않아"라고. 앤디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유년기 추억을 간직하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어느덧 세상에 익숙해졌다는 미명 하에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쁘다며 순수함을 잃어간 그들의 마음을 과거라는 향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 많은 어른들은 <토이스토리3>를 본 후 씁쓸할 것이다. 우리들은 분명 순수하고 행복했건만, 어느새 Sunny side에 종속되어 살아온 건 아닌가라면서 말이다.


태그:#토이스토리3리뷰, #자본주의, #사회주의,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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