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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무마을에서 대평늪 가는 길. 새벽에 내린 비로 사방이 온통 투명하다.
 석무마을에서 대평늪 가는 길. 새벽에 내린 비로 사방이 온통 투명하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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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더니 날이 밝자 사방이 온통 투명했습니다. 정든 석무마을을 떠나는 날, 아침 일찍 질날늪과 대평늪을 다녀왔습니다. 비 샤워를 한 흙과 풀에서 박하 같이 상큼한 향이 진동했습니다. 하지만 강렬하고도 부지런한 8월의 태양이 금세 대지를 데우기 시작했습니다.

늪이 있는 법수면 대송리까지는 자전거로 약 1시간쯤 걸렸습니다. 마을주민들이 10~20분이면 족하다 해서 산책하듯 나섰는데 결국은 몸에 걸친 옷이란 옷은 죄다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병에 물을 채워간 게 다행이었습니다.

 함안군 법수면의 질날늪
 함안군 법수면의 질날늪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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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제346호 함안 대송리 늪지식물(대평늪)' 이정표를 보고 우측 길목으로 들어서니 시작부터 달갑지 않은 건물들이 서 있습니다. 삼성 르노자동차 부품공장을 기점으로 농업용 필름과 콘크리트 등을 생산하는 산업화 기지들이 숲길에 떨어진 레고처럼 띄엄띄엄 박혀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심심찮게 기형 물고기들이 잡혀. 공장은 건너건너 마을에 있는데…, 그거랑 뭔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지." 두 밤을 보낸 '뚱보갈비'네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함안서 나고 자란 가게 이모가 "(자연을)있는 그대로 좀 놔두면 좋겠는데 시골 사람들 말은 들어주질 않아" 하던 것도 기억났습니다.

 질날늪에서 2km여 떨어져 있는 천연기념물 제346호 대평늪
 질날늪에서 2km여 떨어져 있는 천연기념물 제346호 대평늪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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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날늪과 대평늪은 2㎞여 간격을 두고 이 주변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폭발적인 생명력을 지닌 늪은 마치 숲처럼 풍성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채로운 녹색 식물이 늪을 채우고 그 위에 새하얀 백로들이 수를 놓았습니다. 이따금씩 물 속에 사는 날쌘 무언가가 잔잔한 수면 위로 튀어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이정표 외에 외부인의 출입이나 오염물 방류 같은 것을 제한할 시설이나 관리자가 없어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수 년 전 이곳에 서식하는 멸종위기식물 가시연을 대량 훼손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그 후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함안보 가는 길 칠서산업단지.
 함안보 가는 길 칠서산업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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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날늪과 대평늪을 보고 나니 다음 목적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실은 파헤쳐지고 죽어가는 자연보다 고스란히 살아남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함안보 건설현장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습니다.

이틀 전 왔던 길을 다시 돌아 석무에서 악양을 지나 남지로 향했습니다. 공사현장이 가까울수록 주변 풍경이 을씨년스러웠습니다. 특히 칠서산업단지에 들어섰을 땐 생명력 없는 공장 건물과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로 숨이 턱 막혔습니다.

 4대강 사업이 진정 더 크고 행복한 변화를 가져다줄까?
 4대강 사업이 진정 더 크고 행복한 변화를 가져다줄까?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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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모양의 남지교를 건너 드디어 '낙동강 살리기 19공구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오른쪽의 도로 초입 커다란 입간판에 '지금 낙동강은, 더 크고 행복한 변화를 준비합니다'란 문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로 더 크고 행복한 변화일까?' 아무래도 의문스럽습니다.

얼마지 않아 길 옆으로 무덤처럼 쌓인 준설토가 보였습니다. 더는 쌓을 자리가 없어뵈는데 멀리 강가에선 두 대의 포클레인이 여전히 흙을 파내고 있었습니다. 강바닥서 퍼낸 흙으로 뒤덮인 자리는 원래 이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나무와 꽃이 자라고 그것을 터전삼아 살던 숱한 생명들의 보금자리였습니다. 

미처 치우지 않은 이정표 중에는 '이곳은 특수작물재배지오니 출입을 삼가해 주십시오'라던지 '본 지역은(중략) 습지보존지역으로 토석채취 및 습지지역 구조변경 등의 행위를 금한다'는 안내문도 보였습니다.

 낙동강 살리기 19공구 현장. 강에서 퍼낸 준설토가 산처럼 쌓여 있다.
 낙동강 살리기 19공구 현장. 강에서 퍼낸 준설토가 산처럼 쌓여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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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자연을 그대로 놔두는 것 이상 이로운 게 없다 생각하지만 개인의 취향만으로 세상일을 판단할 수 없으니 이곳 사는 주민들 얘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연일 매스컴에 보도되고 공사 관계자부터 환경·시민단체까지 찾아오니 주변 마을에도 동요가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습니다. 연륜도 높고 이곳서 오래도록 사신 분이면 외지 사람들이 모르는 속깊은 얘기도 해주리라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 요즘 여기 분위기 어때요?" "뭐?" "4대강 사업한다고 땅도 파고, 찬성이다 반대다 해서 말들도 많아서요." 이렇게 시작된 대화였지만 대화는 갈수록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이명박(당시 현대건설 재직) 대통령이 예전에 경부고속도로 만들 때도 다 반대했어. 그런데 그거 만들고 우리나라 얼마나 잘 살게 됐어? 발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희생이 반드시 있는 거야. 세상에 완벽이란 게 어딨어? 완벽한 거 봤어? 그리고 내 이 말 꼭 하고 싶었는데 요즘 젊은 것들 김정일 맛 한번 봐야해. 뭣도 모르고 깝치는데 김정일이가 지 애비 죽인 놈이야. 한쪽 눈을 감고 세상을 보면 안 돼.(이하 생략)"

허탈했습니다. 감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애송이 세대'로서 할아버지의 격렬한 역사의식을 탓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란 대목에선 울컥 화가 치밀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와 4대강 사업의 타당성이 같은 맥락에서 주장될 수 없음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낙동강 살리기 18공구 현장. 굴착기 한 대가 허허벌판이 된 땅 위를 달리고 있다.
 낙동강 살리기 18공구 현장. 굴착기 한 대가 허허벌판이 된 땅 위를 달리고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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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근처 그늘에 앉은 할머니와 그보다 좀 젊은 여인들이 그만두라 눈짓을 했습니다. 가까스로 대화를 중단하고 어지러운 심정으로 앉아 있으니 대화 주제를 알고 있는 몇 사람이 한 마디씩 했습니다. "잘은 모르는데 4대강 살리자는데 반대할 건 없잖아." "난 저기서 농사 지었는데 보상금은 받았어도 아쉽긴 하지. 그래도 나라에서 한다니까…."

그러고보니 사업명 하나 잘 지었습니다. 이름처럼 4대강을 살리는 것이면 반대할 까닭이 없으니 말입니다. 이런 어르신들을 두고 환경평가가 어떻고, 준공방식이 어떻고 해봐야 말이 먹히질 않습니다. 식자랍시고 말로 승부하려는 사람들말고 낫 하면 기역 자로 아는 우리 서민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합니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이제 막 건넌 듯한 개구리 한 마리
 돌아오지 못할 강을 이제 막 건넌 듯한 개구리 한 마리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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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유식하고 어려운 말들은 알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않으니 차치하고 제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이유는 '자연스러운 것을 인위적인 것이 결코 이길 수 없다' 바로 이 신념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연을 입맛대로 재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음과 오만의 극치입니다.

대평늪 가던 길, 이제 막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개구리 사체를 봤습니다. 사람은 단 한번도 자연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 섭리를 온전히 이해한 적도 없습니다. 빗물 고인 웅덩이를 코앞에 두고 숨이 멎어버린 개구리의 오늘이 우리의 멀지 않은 미래가 되지 않을까, 걱정 또 걱정되는 요즘입니다.


#국내여행#4대강사업#함안보#늪지#자연은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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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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