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상처, 먼지
멜레나와 조제는 졸린듯이 눈이 반쯤 감겨 있었고, 꼬맹이는 혼자서 머리를 땋으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안내원과 나, '빨간 하이힐'은 뚫어져라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자유스럽게 술병을 가져와선 한잔씩 들면서 할머니에게도 권하고 있었고, 여름날, 마을의 축제에 모여서 영화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우린 방송을 하고 있단 사실을 잊은 채 자유스런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파도 소리에 실린 성우의 목소리와 함께 아가씨가 바다 옆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다 한 쪽으로 이어진 방죽길을 나는 정신없이 걸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알수 없었고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대로 살아가라고만 강요하겠지.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왔다. 내가 오히려 손해볼지언정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 이렇게 혼자서 겉도는 삶을 살아야 하는건가? 비판 받고 인간 이하로 대우 받으며 이렇게 사람들 무리에 끼이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냔 말이다."
아가씨의 절규가 성우의 음성으로 내레이션 되며 그 울림은 파도 속으로 묻혀 버렸다. 그리고 파도소리는 점점 커져가더니 어느 순간에 아가씨의 모습도 덮어버렸다.
1999년 8월 10일
그가 이혼을 하겠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고개를 숙인다. 퇴근 후면 쓰러져서 집에 돌아가도 어느 한쪽 구석에서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어서 요즘은 동네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집에 도착한다는 말을 했다. 자주 가는 술집이 있긴 한데 그런데서 혼자 마시고 있노라면 주인 마담이 부리나케 달려와서 관심을 보이는 것도 싫고, 더 중요한 건 자신에겐 이미 마음의 집이 한 채 지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제는 우리집 창문을 한참 동안 올려다 보다가 돌아갔다고 한다. 나는 그 시간에 열심히 석고상을 닦고 있었다. 물걸레로 석고상의 먼지를 닦아내며, 이젠 그가 없어도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어쩌면 그것조차 일순간의 파도처럼 스러져갈지언정 지금은 제법 단단한 성이 쌓인 듯이 여겨졌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미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나의 삶을 살아보리란 기대감도 조금씩 생겼다.
"나랑 같이 그 최선의 삶을 살면 안될까?"
항상 자신의 갈 길이 있다고 하며 나의 애걸복걸에도 매몰차게 떠나던 사람이 이젠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해버리고 있다. 그는 커피 스푼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얼굴을 들었다. 짙은 그늘이 진 속눈썹 사이로 약간의 물기가 보였다.
이유가 뭔지 묻고 싶었다. 급격하게 마음이 변화된 그 이유가 내겐 중요했고, 이젠 어느 정도의 평온이 온 이후에 또다른 혼란의 골짜기로 들어서기가 싫은 것도 그 한 가지 걸림돌이었다.
"이젠 그 년이 사라졌어. 다신 오지 않아. 아니, 와도 들이기 싫어. 이젠 완전히 정리됐어. 모든 게 전부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각설탕 하나를 손으로 부셔서 가루가 될 때까지 문지르기 시작했다.
"누구나 남의 인생, 남의 가치관은 자신의 것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지. 그래서 세상 모든 고통은 자신만 겪고 있다고 여기는 것일테고."
나는 조용히 한숨쉬며 탁자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 스무살 여름을 보내고 있는 덜 성숙된 여자일 뿐이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그 무언가에 잘못 이끌려서 한 사람의 인생이 엉망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면의 보이지 않는 것에 상처받아서 그 상처가 곪고 진물이 흐르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폭발해 버려서 엉망이 되는 인생도 있을 것이다.
가만히 상처를 내버려두면 치유가 된다고 엄마는 상처에 손을 못대게 했다. 그래야 흉터가 남지 않고 새살이 올라와서 원래대로 돌아갈 수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의 상처도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고 내버려 두고 가끔씩 약만 충실히 발라주면 된다고 여겼었다.
그 약이 이 남자라고는 단정할 순 없었다. 비록 그에게 약을 얻으러 갔을지언정 그는 약이 아닌 또다른 병을 가져다 준 것 같았으니까.
나는 아무런 대답없이 창가의 먼지를 손으로 문질러서 그 손을 자세히 들여다 봤다. 천장에서도 금방 먼지가 쏟아져 내려선 커피잔 안에 떨어질 것 같은 기분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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