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이 640억 원을 걸고 31조 원 사업에 '알박기'를 하고 있다. 단군 이래 최대 알박기다."
김흥성 코레일 대변인이 삼성물산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건설투자사 대표사 자격으로 용산역세권개발(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을 좌지우지해 오던 삼성물산이 막상 자금난에 부딪혀 사업이 좌초될 위기에 빠지자 자금 조달 등 대책 마련에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25% 대주주가 6.4% '실세 주주'에 뿔난 까닭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사장 허준영)은 19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용산역세권개발(주)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물산(대표 정연주 건설부문 사장)에 최후통첩을 했다.
일단 사업 중단까지 초래할 '계약 해지' 선언은 20일 이후로 미루는 대신 삼성물산이 경영권을 갖고 있는 사업 시행사인 용산역세권개발(주) 구조를 전면 개편하고 외부 건설 투자자에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대주주가 같은 투자자인 삼성물산을 이번 사업에서 아예 손 떼게 하고 다른 건설사업자를 끌어들이겠다는 얘기다.
30여 개 투자사가 출자한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주인 드림허브프로젝트금융투자주식회사(자본금 1조 원, 아래 드림허브㈜)에 코레일은 2500억 원(25%)을 투자한 최대 주주이자 지난 2007년 11월 삼성물산이 주도한 '드림허브 컨소시엄'에 사업 부지를 판 '땅주인'으로서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 협약을 해지할 권한도 갖고 있다.
투자사 가운데는 롯데관광개발(15.1%), KB자산운용(지분 10.0%)이 뒤를 잇고 있고 삼성생명(3.0%), 삼성SDS(3.0%) 등 삼성 계열사도 일부 포함돼 있다. 하지만 지분 6.4%(640억 원)에 불과한 삼성물산은 드림허브(주)의 자산관리위탁회사인 용산역세권개발(주) 경영권을 가지고 사업 전반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삼성물산 등 17개 건설투자사들은 지난 6일 열린 드림허브(주) 이사회에서 지난달 재무·전략투자사들이 추가 자금 조달을 위해 제안한 9500억 원 지급보증 중재안을 거부했다. 지분 20%에 불과한 17개 투자사들에게는 너무 과도한 부담이라는 이유였다.
코레일 "삼성물산 빠지면 들어오겠다는 건설사 많다"
이에 코레일은 삼성물산이 대표사 역할 수행을 사실상 거부했다며 지난 13일 용산역세권개발(주) 경영권을 넘겨달라고 직접 요구했으나 아직 공식적인 답변은 없는 상태다.
코레일 김흥성 대변인은 "삼성물산이 우리 아니면 누가 하느냐는 식인데, 컨소시엄 대표사가 빠지고 나면 나머지 16개사 입장도 바뀔 것"이라면서 "삼성이 빠진다면 들어오겠다는 다른 건설사들도 많다"고 밝혔다.
다만 김 대변인은 "삼성이 6.4% 지분까지 팔고 나갈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면서 "용산역세권개발(주) 경영권 반납이 우리 요구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삼성물산, 계약 해지 유보에 안도... "이사회 때 입장 내놓겠다"
하지만 이러한 코레일의 요구가 오는 23일 열리는 드림허브 이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긴 어려운 현실이다. 용산역세권개발(주)에 위탁계약 중도해지 등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드림허브 이사회에서 80% 이상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이사진 10명 가운데 삼성물산이 2명, 삼성SDS 1명 등 삼성 계열 이사가 3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역시 3명의 이사를 갖고 있는 코레일은 이사회에서 여의치 않으면 주주총회로 안건을 넘기겠다고 밝혔다.
삼성물산쪽은 이날 코레일의 계약 해지 유보에는 일단 안도하면서도 "다음 주 열리는 이사회 전까지 심사숙고해서 공식 입장을 내놓을 것"이라면서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다만 삼성물산 홍보팀 관계자는 이날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개발 사업이 장기 사업이다보니 중간 중간 상황이 바뀌고 리스크도 생긴다"면서 "코레일이 공기업이다 보니 땅값 8조 원이 제때 안 들어오니까 못 참아 장외로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용산역세권개발(주) 경영권 문제와 관련해선 "우리 계열사가 맞긴 하지만 초기 개발 사업 노하우가 없어 인력과 자금을 지원하다보니 지분이 높아진 것"이라면서 "회사 역할도 삼성물산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모든 참여사를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서부이촌동 주민들, 회견장 소동-시청 앞 삭발 시위
한편 이날 코레일 기자회견장에 용산 주민 3명이 뛰어들어 회견이 한때 중단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용산역세권개발 대상지인 서부이촌동 주민이라고 밝힌 이들은 "주민들이 개발 동의서를 내고 3년 동안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돈이 없다고 사업을 중단하려 한다"면서 "코레일과 삼성물산, 서울시가 다 자기들 잇속 차리려 하고 있다"고 싸잡아 비난했다.
서부이촌동 주민발전협의회 등 개발 지역 주민 100여 명은 이날 오후 1시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서울시에 용산역세권개발 사업 지연에 따른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서부이촌동 성원아파트동의자협의회 회장인 김경로씨가 삭발하기도 했다.
김씨는 "코레일과 서울시(SH공사 4.9%) 지분 참여를 믿고 주민들이 개발에 동의했는데 이제와 나 몰라라 하고 있다"면서 "사업이 취소되면 땅값이 떨어져 은행 융자 받은 사람들은 파산에 이를 지경"이라고 신속한 개발을 요구했다.
용산역세권 개발 사업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 철도정비창 부지와 서부이촌동 일대 56만6800제곱미터(약 17만 평) 부지를 국제업무-상업-주거지구로 개발하는 31조 원 규모의 초대형 프로젝트로 '단군 이래 최대 개발 사업'으로 불릴 정도였다. 계획대로라면 2012년 본격적으로 건축 공사를 시작해 2016년 말 106층짜리 랜드마크 타워까지 준공할 예정이었다.
애초 삼성물산 등이 주도한 드림허브 컨소시엄이 코레일에 8조 원 땅값을 지불하기로 하고 사업권을 확보했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로 수천 억 규모의 중도금조차 조달이 어려워지며 벽에 부딪혔다. 당장 다음달 17일까지 지난해 발행한 8500억 원 규모 자산유동화증권(ABS)에 대한 이자 128억 원을 내지 못하면 드림허브(주)는 '디폴트(파산)'를 맞게 된다. 이에 최근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이 정부 개입 가능성까지 밝힌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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