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사극 드라마 <동이>가 중반을 넘어 재미를 더해간다. 늦은 퇴근에 막걸리 한 잔,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집에 들어가니 동이가 둘째 왕자를 낳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다음주에는 또 어떻게 될까라는 아슬아슬한 궁금증을 남겨 놓고 끝이 났다. "그만 끄고 자자. 양치하고 세수하고..." 아이들을 화장실로 밀어 넣으며 리모콘을 찾는다.
"안 돼요. 오늘 <PD수첩> 하는 날인데. 4대강 이야기 나온다는데..." 아내가 볼멘 소리를 한다. 양치를 하고 느긋하고 TV 앞에 앉으니 생뚱 맞은 프로가 나온다.
"뭐야, <PD수첩> 본다며?" "그러게요. 이상한 프로가 나오네요. 방송국 사정으로 안한다네요. 방송 못하게 한다고 법원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다더니만... 시청자를 뭘로 아는 거야." 갑자기 열받은 아내를 대신해 방송국 홈페이지가 들어가니 난리다. 방송국에 전화를 돌렸다. 계속 통화 중. 이쯤되면 나도 열을 받는다. 30분을 넘게 누가 이기나 보자고 전화 버튼을 눌렀지만 계속 통화 중. 연결되어도 동이가 어떻고 광고 멘트가 나오다가 뚝.
'나쁜 놈들. 동네 케이블 방송도 이렇게 제 맘대로 하지는 않을 꺼다. TV 꺼!' 짜증을 수습하지 못한 채 잠이 든 것이 17일 밤 일이다.
MBC <PD수첩>이 방영하기로 한 '4대강 수심 6m의 비밀'을 국토해양부가 나서서 법원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으나 기각된 것이 방송이 예정되어있던 17일 오후의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PD수첩>이 준비한 내용이 방영을 중단할 만 하지 않기 때문에 방송을 해도 좋다는 법리적 해석을 법원이 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방송 3시간 전에 사장과 경영진은 자신들의 사전 시사 요구를 불응했다는 이유로 일방적 결방을 선언했고, TV 앞에 앉아 있던 나와 아내, <PD수첩>을 기다려 온 국민들은 졸지에 눈뜨고 알권리를 도둑 맞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법에 의한 판단(방송금지 가처분 신청 기각)은 MBC 사장과 경영진에게는 무시해도 그만인 결정이었는지, 공정방송을 위해 노사가 합의해 지켜온 단협의 '국장 책임제'라는 것이 사장 말 한 마디보다도 값어치 없는 것인지 지켜보는 국민들은 당혹스럽기 이를 데 없다.
'법과 원칙?', '백 없고 돈 없는 게 죄?'... 어떤 게 솔직할까
'법과 원칙.'이명박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화두처럼, 보검처럼 말해 왔다. 광복절 기념식에서도 "앞으로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공정한 사회'라는 원칙이 확고히 준수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국민들 앞에 역설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법과 원칙은 만인 앞에 평등한가?, 공정한 사회는 이런 정치 풍토에서 실현 가능한 명제인가라는 회의가 든다. 차라리 '억울하면 출세하지' '백 없고 돈 없는 게 죄'라는 씁쓸한 농담이 현실에서는 더 유용하고 솔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의 전교조 명단 공개 논란은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조차 법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법원의 전교조 명단 공개 금지 가처분 판결에도 불구하고 학부모의 알권리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명단 공개를 강행했다. 어디 이뿐인가?
국회의원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지적에 조 의원이 위기에 직면하자 한나라당 동료 의원들은 자기 홈페이지에 너도 나도 전교조 명단을 게재하는 눈물겨운 동료애(?)를 보여 주었다. 보수 언론은 공개 금지 판결을 내린 판사의 이력까지 들먹이며 그들을 거들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보기에 일련의 행동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법의 무시, 특정 이익을 위해 법이라는 합의된 원칙 앞에 이빨을 드러내고 모여드는 하이에나 무리와 다를 바 없었다.
지난 10년, 위장 전입이 드러나 처벌을 받은 사람이 5천여 명, 일 년에 5백여 명에 이른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유도 가지가지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노후 보금자리를 위해, 재산 증식을 위해... 그러나 이유야 어찌됐건 현 주민등록법은 위장 전입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게끔 명시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처벌이 계속되어 왔다.
또다른 측면에서는 위장전입 문제는 공직자의 선발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민주정권 10년 한나라당이 야당이던 시절 장상 국무총리 서리는 위장전입 문제가 불거져 서리의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낙마하고 말았다. 이밖에도 장대환 국무총리 후보자, 주양자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등이 많은 인사들이 위장 전입이라는 한나라당의 공세에 낙마하거나 중도 사퇴해야만 했다. 능력과 자질을 떠나 법을 위반한 사람들은 공직자가 될 수 없다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호통에 국민들은 박수를 쳤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지지자라도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현대판 맹모삼천지교, 그래서 따라 배울까?
이명박 정부의 개각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이현동 국세청장 후보자,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가 후보자 검증 청문회에 앞서 위장 전입을 시인했다. 신재민 문화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 무려 다섯차례 위장 전입을 했다. 그러나 이들을 지명한 청와대나 당사자들 역시 지명을 철회하거나 자진 사퇴할 의사가 없다. 더구더나 청와대는 위장전입 문제는 인사를 철회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혼란스럽다. 위장 전입으로 지난 10년간 처벌받은 5천여 명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해야 할지, 백도 돈도 없이 위장 전입하는 무모함을 비난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신재민 문화부 장관 후보자의 다섯차례 위장 전입을 두고 장관 자질이 안 되니 내려 오라고 해야 할지, 현대판 맹모삼천지교라고 칭송하고 따라 배워야 할지 혼란스럽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이 교과서 같은 원칙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라고 한다. 법의 잣대가 사람의 지위에 따라 달라지고, 권력의 힘에 따라 범법, 위법이 판단된다면 삼권 분립 제도 없이 왕의 한마디에 사람의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봉건주의와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묻는다. 위장 전입자도 능력을 우선해서 발탁하는 것이 실용 정부의 정치 철학이라면 위장 전입을 할 수 있는 사람, 해서는 안 되는 사람도 구분해 줘야 되는 게 아니냐고? 위장 전입 후보자들을 감싸 안아 옹호하려면 지난 정권에서 위장 전입으로 낙마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사과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차제에 위장 전입을 합법화하는 법 개정을 할 용의가 있는지를 먼저 밝혀야 되는 게 아니냐고.
법은 백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율만이 아니다. 법은 촛불들이 넘지 말아야 할 폴리스라인만이 아니다. 방송국 사장이 법의 권고를 무시하고, 국회의원들이 집단으로 법원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권력의 편에 선 자들은 불법 위장 전입에도 하루 아침에 면죄부를 받고 장·차관으로 입각하는 사회.
누가 보더라도 민주주의의 운영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에게는 끊임 없이 법치주의를 강조하고 법과 원칙만 강조한다면 법은 힘없는 국민들에게는 기준, 잣대가 아니라 몽둥이이며 신분을 규정하는 사슬일 뿐이다.
누구는 법 위에 군림하고 누구는 법 아래 벌벌 떨고 국회의원, 장·차관이 법을 경시하는데 힘 없는 국민들이 법을 존중할 수 있을까. 권력자들이 법을 경시하고 자의적으로 운용하면 국민들은 법을 무서워하고 기피할 뿐 존중하지는 않는다. 좀도둑은 큰도둑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큰도둑은 범법을 면죄 받을 수 있는 도둑을 부러워 한다면 이런 사회는 공정한 사회도, 법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도 아니다.
국민의 바람은 크지 않다. 이 사회가 만들어진 법과 상식의 수준에서 운용되고 흘러 가길 바란다. 법에서 당장 방송을 중단할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면 화요일 밤에는 MBC에서 드라마 <동이>가 끝나고 <PD수첩>이 나오는 게 맞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라면 그 행위가 옳고 그름을 떠나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 주는 것이 상식이다. 위장전입의 불법을 저질렀다면 반성하고 공직에서 물러 나는 게 국민이 아는 상식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이유로도 중용하지 않는 게 국민들이 아는 상식이고 법의 원칙이다.
위정자들이여! 제발 법 좀 지키고 살자. 당신들은 법위에 군림하고 국민들은 법 아래서 두려움에 떠는 세상, 진정 당신들이 말하는 법치주의는 아니지 않는가?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이 말을 우리 아이에게 삶의 기준으로 가르칠 수 있는 세상. 국민의 바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