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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출범한 '행동하는 양심' (이사장 이해동 목사) 회원 100여 명은 21일부터 이틀 동안 김대중 대통령 생가가 있는 하의도에서 '2010 청년 김대중 캠프'를 개최하고, 김 전 대통령의 민주·평화 정신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회원들은 21일 오후 2시 하의도로 향하는 신안 페리 2호 선상에서 <김대중 자서전>을 집필한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강연(주제: '섬 소년, 김대중의 꿈')을 듣는 것으로 첫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캠프에 참여한 회원들은 부모를 따라온 10대 청소년에서 80대 노인까지 연령층과 직업도 다양했는데, 진지한 표정으로 강연을 경청했고, 공감이 가는 대목에서는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지기도.

 

  

김 편집위원은 강연에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이 사람들에게 널리 도움이 되는 기록으로 남길 바랐다면서 1권은 소설같이, 2권은 정책교과서처럼 쓰인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쓰게 된 계기도 설명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2004년 4월에 처음 뵈었고, 대통령님 제의로 자서전 집필을 시작했다"며 한국인의 우수성에 흔들림 없는 신뢰를 나타내는 대통령의 일관된 태도에 집필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과거에는 민주투사 이미지가 컸는데, 권력을 내려놓은 이후 분노는 모두 가시고, 용서를 통해 인생을 관조하는 분위기가 풍겼다"며 자서전을 준비하는 6년 동안 보고 느낀 개인 소감도 털어놓았다. 

 

김 위원은 "당시 김 전 대통령은 한류가 일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며 "불교가 도입되어 해동불교가 됐고, 유교도 더욱 발전됐듯 한국인의 문화잠재력을 믿는다고 역설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 위원은 "불편한 몸에도 정원에서 햇볕을 받지 못하는 꽃의 뿌리를 파서 자리를 바꿔줄 정도로, 김 전 대통령은 작은 것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김 위원은 평화 시위에 참가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잡혀가는 모습에 김 전 대통령은 무척 가슴 아파하며 "죽는 날까지 민주주의를 외치며 잠들겠다"며 "내가 여태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살았는데 비록 권력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끈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강의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두 회원의 질문을 받았다. 2권은 너무 빨리 전개되어 처음 보는 분들을 위해 박해받는 내용을 보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의견과 역대 대통령들에게 박해를 받고도 어떻게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은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님은 자서전을 부탁하면서 세 가지를 당부했어요. 첫째는 공정하게, 두 번째는 젊은이들의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되게, 세 번째는 소설처럼 재미있게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 설명했던 것처럼 1권은 도전과 응전의 삶이고, 2권은 대통령님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2권은 조금 지루할지 모르겠습니다.

 

화해와 용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어요. 화해는 사과가 전제되어야 하고, 용서는 사과하지 않았을 때하는 것이라며 전두환, 김영삼씨를 용서했어요. 왜냐, 전두환씨는 죽이려고 했고, 민주화 동지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92년 대선을 앞두고 '사상이 의심되는 사람은 대통령을 할 수 없다'고 해놓고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는 병원에 와서 화해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화해가 아니지요. 이런 얘기를 하려면 또 열이 오르는데···."

 

강연이 끝나고 잠시 만난 이해동 목사는 "성경에서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신 분이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며 "작년 8월 전직 대통령들이 문병하러 다녀갔는데, 이희호 여사에게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할 때가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었습니다'라고 인사한 사람이 전두환씨였다"며 김 위원의 말에 공감했다.

 

김대중 대통령 생가에서

 

오후 4시 조금 넘어 배가 하의도 웅곡항에 도착하자 회원들은 대형버스 두 대와 몇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소금박물관, 하의도 농민운동 기념관 등을 둘러보고, 후광리에 있는 김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다.

 

 

생가에 도착한 일행은 '하의 3도 농지탈환운동기념사업회' 김학윤(75세) 회장이 전하는 김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또 한 번 놀랐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 이름 후광(後廣)을 따서 호로 사용하였고, 복원된 생가터도 원래 위치와 조금 다르다는 것.

 

"보시다시피 초가이지만, 당시로는 중농 이상이 사는 집으로 보이잖소.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솔직히 확 까놓고 얘기할게요. 이 생가는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 아니고, 진짜 생가터는 저쪽에 표시되어 있어요.

 

처음엔 대통령 어머니(장수금 여사)가 저쪽 염전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밥해주는 합바 일을 했어요. 그란디 일꾼들이 '밥만 팔믄 쓰겄소, 술도 한 잔씩 팔어야지!' 하고 성화를 대니께 막걸리도 팔았어요. 막걸리를 가져다 놓으니까 매상도 훨씬 더 올랐고, 그렇게 고생혀감서 돈을 벌어가꼬 이 집을 샀지.

 

그란디 그때는 마침 이 섬에 초등학교가 4학년까지밖에 없었어요. 돈도 좀 벌고 혀서 가리칠만 혔는디···. 그러니께 어머니가 아들을 목포로 데리고 나가서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결심하고, 아버지(김윤식)에게 상의한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오케이 혔지. 

 

일본놈들은 우리가 문명교육을 받지 못하게 학교를 부근 다른 섬들에 비해 10년 늦게 세웠어요. 그란디 김대중 대통령은 '여그(하의도)에 학교가 늦게 세워졌기 때문에 내가 대통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어요. 그때는 목포로 나가서 학교 다니는 게 지금의 미국 유학 가는 것보다 더 어려웠응게. 그란 걸 보면 세상 일이 맘대로 되는 게 아닙디다!"

 

밤 8시부터는 캠프 참가자들과 하의도 주민들이 함께 하는 어울림 마당이 열렸다. 어울림 마당은 풍물공연, '인동초 골든벨', 무예시범, 하의도초등학교 학생의 추모 글과 최영 시인의 추모 시 낭독, 노래자랑, 캠프파이어 등으로 이어졌다. 아래는 최영 시인의 추모시

 

 오늘, 선생님 참 그립습니다

 

선생님 살아계실 때

우리는 참 행복했습니다.

1971년 대선 연설광경을

전주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보았습니다.

선생님 연설을 들으면서 참 좋다, 했습니다.

그 때 총각이었고

다음은 집사람과 함께

그다음은 집사람과 자식들과 함께

그리고 그 그다음 집사람, 자식, 며느리들과 함께 찍은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대통령이 되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의 생에 선생님이 계셨던 것으로 행복했을 거예요.

 

저들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도쿄에서 납치당했을 때

형무소에 계셨을 때

망명 하셨을 때

가택연금을 당할 때

당신은 너무 많은 고생을 했지만

우리 민초들은 인고의 세월 기다림을 함께 하며

참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살아계실 때

숱한 자들에 의한 박해와 오해는

도도한 세월의 강물로 흘러가면서

염천의 하늘과 땅 사이 강물로 흐르면서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잘되고 잘못된 것을 함께

아우르는 찬란한 강은 빛날 것입니다.

 

모략 자들이 주는 생채기는

역사의 강이 치유되면서 남북이 하나 되는 날

없어질 휴전선, 지구에 하나 뿐인 온전한 천혜의 생태공원 중간쯤에

통일의 상징으로 당신의 석상 하나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늘 시대는 어렵지만 불굴의 의지와

희망으로 가야할 사람들의 마음 한중간에 당신은 있을 거예요. 

 

세월이 가면

나도 우리도 갈 어느 뒷날

선생님은 큰 역사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작은 역사일 것입니다.

오늘

선생님 참 그립습니다.

 

2010년 8월 21일 시인 최영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대중#하의도#행동하는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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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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