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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님과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간 계곡 물놀이
 시부모님과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간 계곡 물놀이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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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가 놀러가자고 초청했을 때 흔쾌히 와 주신 어르신들
 우리 아버지가 놀러가자고 초청했을 때 흔쾌히 와 주신 어르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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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 시부모님이랑 큰 시누이네, 작은 시누이네랑 계곡에 놀러갔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꼭 가야 하셔서 길 가다가 어느 파출소 앞에서 차를 세웠다. 아버지는 도착해서도 그러셨지만 나는 이상하지 않았다. 남편도, 우리 큰아이도, 밥 먹고 나면 결과물을 확인하기 위해 곧바로 화장실에 가니까 이들의 본류인 아버지도 그런 걸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누이들은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고, 다음 날 바로 전북대학교 병원으로 갔다. 그 다음 날에는 서울 삼성병원으로 올라갔다. 아버지가 오랜 세월 동안 치질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은 직장암, 그 놈은 이미 아버지 몸 여기저기를 노리고 있었다. 비뇨기암까지 발견되었다.

시누이들이 아버지에게 암이라고 알렸지만 그 속사정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낙관적인 분이라 딸들 앞에서 의연하게 계셨더란다. 당신이 이제 투병자가 되었다는 걸 알고 나서도 병원에서 나와 식사를 맛있게 하셨고, 작은 시누이는 자꾸만 목이 메더란다. 며칠 뒤에야 그 이야기를 들은 나도 코끝이 아려오고 눈이 어룽어룽해졌다.

며느리 된 지 14년, 나의 시아버지 '강호병님'

시대 보다 앞선 생각으로 사시는 우리 아버지 강호병님. 첫 딸을 얻고 너무 기뻐서 첫사랑의 이름을 갖다 붙이신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
 시대 보다 앞선 생각으로 사시는 우리 아버지 강호병님. 첫 딸을 얻고 너무 기뻐서 첫사랑의 이름을 갖다 붙이신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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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연세는 77세.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치셨다. 논밭에서 농사짓고, 강에서 고기 잡고, 가끔씩 동네 염전에서 일한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시대보다 앞선 생각을 가지셨다. 첫 아이가 큰 딸이어도 기뻐할 줄 알았고, 딸 이름에 첫사랑의 이름을 붙이는 대책 없는 낭만도 갖추셨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셨다.

아버지 며느리가 된 지 14년, 아버지가 차려 주신 밥상을 참 많이도 먹었지만 내가 단독으로 아버지 밥을 해 드린 적이 없다. 아버지가 농사지어서 찧어주시는 쌀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고마움에 애가 끓은 적이 없다. 인상 찌푸린 적 없이 허허 웃고 있어서 아버지는 언제나 건강하고 유쾌하시다고, 나 편한 대로만 생각했다. 

아버지는 한 달여 만에 몇 차례나 서울 병원으로 검사 받으러 다니신다. 집에 돌아오면, 보통 때처럼 어머니를 건사하신다. 언제부턴가 눈에 띄게 부쩍 기력이 달리고, 식사도 잘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아버지는 집안 살림도 도맡아 오셨다. 아버지는 큰 병원에 다녀온 날이라고 예외로 치지 않고, 어머니 밥상을 차리신다.

잠을 못 자고, 혼자 있으면 눈물을 쏟는 시누이들은 거의 날마다 아버지 집에 간다. 하지만 나는 차로 20분 거리에 살면서도 아기가 어리고, 밥벌이 하느라 시간이 촘촘하다고, 주말에나 겨우 간다. 얍삽하게 입만 살아서 전화만 자주 한다. 지난 20일 금요일에는 시간이 났는데 큰 아이가 아프고, 날씨가 잡아먹을 것처럼 더웠다.

"아버지, 오늘 잠깐 수산리(시댁) 갈려고 했는데 못 가겠어요. 일요일에 갈게요."
"오지 마라. 우리 놀러 가. 민숙이(작은 시누이)가 데리고 간단다."
"우리도 따라가면 되는데요?"
"그게 아니고, 아버지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같이 가는데 자리가 없어. 민숙이 회사 차로 가니까."

작은 시누이는 원래 아버지 어머니만 모시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당신하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 분들과 그 아내들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하셨다. 작은 시누이는 아버지 하고 싶은 대로 따르겠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또 맘에 걸리는 게 있으셨다. 여섯 명의 '초청 인사'를 정하고 보니, 이 사람 저 사람이 자꾸만 눈에 밟히신다고.

어쩌나 보니 동네 관광 자처한 자식들

그날 저녁, 아버지 어머니가 낳은 5남매 중 서울 사는 막내 시누이만 빼고 모였다. 일도 크게 벌이기로 했다. 단박에 관광버스를 빌리고, 떡을 맞추고, 고기와 얼음을 주문하고, 술과 안주, 과일을 정하고, 점심은 현지에서 사 먹기로 결정했다. 그 밖에 자잘한 것들은 큰 시누이와 남편이 따로 만나서 사기로 했다.

전실 어르신 부부, 남편 친구 전창욱님의 부모님이다. 아버지는 꼭 이렇게 부르신다. "어이, 전실이!"
 전실 어르신 부부, 남편 친구 전창욱님의 부모님이다. 아버지는 꼭 이렇게 부르신다. "어이, 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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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배 어르신 부부. 시댁 동네에서 춤과 노래와 깨방정을 맡고 계신 만능 엔터테이너...^^
 전선배 어르신 부부. 시댁 동네에서 춤과 노래와 깨방정을 맡고 계신 만능 엔터테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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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일요일 오전 8시 30분, 예배당에 가는 분들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합쳐 26명. 어르신들은 관광 기분 나게 화사한 옷을 차려입고 오셨다. 우리는 새만금에서 부안, 고창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후텁지근하다며 출발하자마자 목적지를 바꾸자고 하셨다. 발 담그고 놀 수 있는 계곡으로 가자고. 버스 기사는 완주로 차를 몰았다.

차 안에서 어르신들이 왜 초청해서 놀러 가냐고들 물으셨다. 시누이들은 그냥 웃었다. 어떤 어르신은 우리 아버지가 곧 있으면 팔순이신데 환갑이냐고 재치 있게 물으셨다. 남편이 마이크를 잡았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호병이네 막둥이'인 남편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진심 그대로만 말했다.

"고맙습니다. 자식들이 다 시내 살아서 걱정이 많은데 우리 부모님을 많이 챙겨주시고, 가깝게 지내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성함을 모르겠다. 남편 친구의 부모님이시다. 지금도 자가운전을 하고 다니신다.
 성함을 모르겠다. 남편 친구의 부모님이시다. 지금도 자가운전을 하고 다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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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부모님, 그리고 큰시누이가 "기성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어르신 부부. 한 동네에 살지 않지만 아버지의 절친이시다.
 우리 시부모님, 그리고 큰시누이가 "기성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어르신 부부. 한 동네에 살지 않지만 아버지의 절친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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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 인기 맞먹은 아버지의 투망질

계곡은 맑고 차가워서 좋았다. 나는 아버지 사진을 스토커처럼 따라붙으며 찍었다. 아버지한테 건네지는 막걸리도 잽싸게 가로채서 먹었다. 옆에 계신 어르신이 "호병이는 메느리를 참 이뻐해. 나는 메느리가 몇이라도 이뻐하들 안했어"라고 하셨다. 조금 앙상해지신 아버지 얼굴은 웃고 계셨다. 나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게 그냥 좋았다.

계곡 위에 있는 밥집에서 차려 준 점심을 먹고 나서는 아버지 곁에 15개월 된 작은 아이를 억지로 세워두었다. 돌 날, 식구들끼리만 밥 먹는데도 울며불며 돌잡이 대신 내 어깨를 잡은 꽃얄리군. 할아버지랑 둘이만 있으라니까 분한 듯 서럽게 울었다. 아버지는 꽃얄리군 손에 돌을 쥐어주면서 살살 달래셨다. 

돌잡이로 엄마 어깨를 잡은 꽃얄리군. "저는 커서 엄마가 되는 건가요?" 라는 소심을 고민을 하는가? 아빠와 둘이 있어도 우는 아기를 할아버지랑 둘이 있으랬더니 대성통곡 중...^^
 돌잡이로 엄마 어깨를 잡은 꽃얄리군. "저는 커서 엄마가 되는 건가요?" 라는 소심을 고민을 하는가? 아빠와 둘이 있어도 우는 아기를 할아버지랑 둘이 있으랬더니 대성통곡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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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매력에 빠져든 꽃얄리군.
 할아버지 매력에 빠져든 꽃얄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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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남자 어르신들은 본격적으로 물에 들어가서 노셨다. 여자 어르신들은 일흔이 넘었지만 '생리' 중이라 물에 못 들어간다고 버텼고, 막상 물에 들어가서는 나올 줄을 모르셨다. 노래가 나오고, 술이 돌고, 서로의 흥이 만나 춤이 되었다. 아직도 물에 들어오지 않는 어르신들에게는 '비겁한 사나이'라고 야유를 보내면서 한 분씩 끌고 들어왔다.

나는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 갔을 때처럼, 촉을 세우고 성실하게 어르신들의 공연을 봤다. 노래 끝날 때마다 박수와 열광은 기본, "호병이네 작은 며느리가 최고네"라는 찬사까지 받았다. 그런데 물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나오셨다. 순식간에 물 속에서 가무를 즐기는 어르신들에게 투망을 던지셨다. 

이게 끝이 아니기를, 이게 끝이 아니기를

우리는 압도당했다. 오, 이렇게 재밌을 수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전날 넘어져서 다리에 깁스를 하고 시누이들과 고스톱만 치던 어머니도 '빵' 터지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한 것은 이런 거였구나. 그물에 걸리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뒤집어질 정도로 신나게 웃어보라는 뜻이었구나.

오후 4시 넘어 자리를 정리했다. 그렇지만 어르신들 노래 가락은 끊어지지 않고 돌아오는 관광버스 안까지 따라왔다. 아버지가 제안한 '초청 물놀이'는 저녁밥으로 오리 주물럭을 먹고 나서 끝났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기를. 아버지의 매혹적인 투망질이 우리 아이들한테 전수될 때까지, 그 때까지 이어지기를.

사람을 낚는 달인 강호병 선생. 걸려든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뒤집어지게 웃기다
 사람을 낚는 달인 강호병 선생. 걸려든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뒤집어지게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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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매혹적인 투망질이 우리 아이들한테 전수될 때까지, 그 때까지 아버지 건강하셔야 해요.
 아버지의 매혹적인 투망질이 우리 아이들한테 전수될 때까지, 그 때까지 아버지 건강하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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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물놀이, #아버지 강호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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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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