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문명을 오가게 하는 징검다리다. 징검다리가 없으면 개울을 건널 수 없는 것처럼 길이 없으면 문명은 교류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길을 떠난 문명의 교류란 상상할 수 없으며, 길을 알아내는 것은 문명교류를 연구하는 데 선결조건이다. 바꿔 말하면, 문명교류가 있었다면 길은 필히 있었다는 것이며, 교류와 길은 바늘 가는 데 실이 가듯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실 길을 제대로 알고 연구해야 교류의 과정이나 교류물의 원류, 그리고 그 접변과정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문명교류의 길을 통칭 실크로드라고 한다."(155쪽)
실크로드는 보통 동서 문명의 교류로 통한다. 그러나 문명사가 토인비나 안보전략가 헝틴턴은 서구문명만을 최고에 두었다. 그들은 초원 위에 펼친 스키타이, 돌궐, 흉노, 몽골 유목민과 정주민들 사이에 펼친 갈등과 대결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관심만이 유럽문명을 초미의 관심사로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세계적인 문명교류학자인 정수일 교수의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는 유럽 중심의 문명을 치켜세우는 것이 얼마나 단세포적인가를 보여준다. 더욱이 실크로드가 유럽과 맞닿아 있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끝나는 게 얼마나 단순무지한 것인지도 깨우쳐 준다. 중국의 역사는 고구려를 빼놓고는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서다.
그것이 러시아에서부터 한반도까지 이어야만이 참된 실크로드임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요하문명'이니 '동북아 문화공동체'니 하는 침소봉대식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도 경계한다. 모든 문명은 서로간의 창의적인 접변(接變)에 관한 교류임을 강조하는 이유에서다.
그건 유목민에서 기마민족으로 함께 그 길을 터 나갔던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몽골땅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부터 '고려풍'의 유사성을 느꼈다는 것도 같은 생각 때문이다. 시베리아 동단 연해주가 해동성국 발해의 고토인 것을 확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어떤 것들은 우리가 중국보다 한 수 위에 서 있는 것도 있다.
정수일 교수가 한반도까지 뻗은 실크로드를 복원하려고 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2007년부터 2년간 중국 내몽골에서 출발해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몽골의 초원을 지나 러시아에 이르는 초원실크로드를 직접 답사했다. 그 속에서 몽골의 초원로가 한반도까지 가로지르고 있음을, 시베리아 초원로가 한민족의 본향인 바이칼과 한 고리였음을 밝혀낸다.
그렇다고 우리 것만 밝히는 데 주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칭기스칸의 후예들로부터 분명 배울 점이 있다고 강조한다. 무엇일까? 바로 시민참여 민주주의를 오래전부터 도입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른바 족장회의로 통칭되는 '쿠릴타이'가 그것이다. 그것이 그 당시의 다민족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체계였단다. 자기만의 성을 쌓는 자는 망하지만 그 길을 열고 소통하는 자는 살아남는다는 비결이 바로 그것이다. 현 정부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한편 실크로드라고 하여 옛 초원 위의 역사만 되밟는 게 아니다. 현대 역사도 기꺼이 추적한다. 이른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이범진 열사와 그 추모비를 새기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범진 열사가 한국근대사에서 아관파천을 주도해 나라의 이권을 러시아에 넘겨준 이로 지목되었다지만 그의 공(功)에 초점을 맞춰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쌍뜨뻬쩨르부르끄 파르그로보 3번지 북방묘지 제 8구역에는 2002년 7월에 세워진 이범진 공사의 추모비가 의연하게 서 있다. 추모비에는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 3일 서울에서 탄생하여 1911년 1우러 13일 러시아 쌍뜨뻬쩨르부르그에서 순국한 대한의 추인이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라는 한 마디 글귀에서 '순국지사'이자 '독립운동가'란 명예를 읽을 수 있지 않나 싶어 그나마 위안을 느낀다."(511쪽)
아무쪼록 우리나라의 위상을 세워주면서도 결코 침소봉대하려 하지 않는 정수일 식의 문명교류서<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통해 동서교류의 참된 실크로드를 새롭게 추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서구의 문명사가나 안보전략가들에 의한 유럽사 중심의 실크로드가 아닌 한국사 중심의 실크로드를 함께 세워나갔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