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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엄청난 태풍인 곤파스가 한반도 일대를 휩쓸고 간 날은 우리 고3들의 9월 모의고사 날이었다. 초등, 중등 학생들 등교가 2시간 뒤로 미루어졌다는 뉴스를 접했다. 하지만 고등학생인 우리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모의고사라는 시험 때문이었다. 태풍을 뚫고 시험을 보러 등교를 했다.

태풍 뚫고 학교까지 40분...근데 정전이잖아

곤파스의 작품(?)-쓰러진 나무 교정에 있던 나무가 쓰러진 모습이다.
▲ 곤파스의 작품(?)-쓰러진 나무 교정에 있던 나무가 쓰러진 모습이다.
ⓒ 박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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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교통 마비였다. 평소에는 마을버스를 타고 20분 거리인 등굣길이 신호등 고장과 교통체증으로 인해 혼란이 빚어져서 40분이나 걸렸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도착한 학교. 정문을 통과한 순간 우리를 맞이해 준 것은 부러진 나무와 강당 앞에 세워 두었던 바리케이드가 시체놀이(?)를 하듯 쓰러진 모습이었다.

시체놀이 중인 바리케이드...ㅜㅜ 공사로 인해 세워 둔 바리케이드가 태풍 때문에 쓰러진 모습이다.
▲ 시체놀이 중인 바리케이드...ㅜㅜ 공사로 인해 세워 둔 바리케이드가 태풍 때문에 쓰러진 모습이다.
ⓒ 박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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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건물로 들어선 순간 더더욱 말을 잃었다. 모든 건물에는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학교가 정전이 된 것이다. 알고 보니 이번 태풍으로 인해 우리 학교 근방에 있는 모든 지역이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서울시 구로구). 고3, 아니 고등학교 생활 3년 중 가장 중요하다는 고3, 9월 모의고사에 정전이라는 사태가 벌어지니 학교는 이미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교실로 들어서자 역시 학생들은 걱정에 휩싸였다. 정전이 되었으니 언어, 외국어 듣기 문제는커녕 전등조차 들어오지 않아 시험지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학생들은 이런 상황에서 시험을 볼 수 없다며, 선생님들께 오늘 시험을 보지 않도록 해달라고 다들 한 마디씩 했다.

"너희 중에 야맹증 있는 사람?" 암흑 속에서 시험을 치르다

깜깜한 교실... 태풍 때문에 정전사태가 벌어진 교실의 모습이다.
▲ 깜깜한 교실... 태풍 때문에 정전사태가 벌어진 교실의 모습이다.
ⓒ 박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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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선생님들은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결국 전국의 모든 학교의 모의고사 1교시 시작 시간인 오전8시 40분이 넘어서도 여전히 정전사태가 계속되었다. 40분이 넘었으니 당연히 시험이 미뤄지겠구나 하던 생각도 잠시. 선생님들 중 어떤 한 분께서 야맹증이 있는 사람이 있냐고 각 반을 돌며 물어보셨다. 그러던 8시 53분. 선생님이 뛰어오시더니 시험지를 꺼내셨다. 그대로 시험을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은 야유를 하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시험을 보냐고 항의를 했지만 이미 학교에서 결정난 것이라 어쩔 수 없다며 시험을 치르게 했다.

그렇게 1교시 언어영역시험이 시작되었다. 컴컴한 교실에서 급히 치러진 시험. 집중이 잘 될 리 만무하다. 또한 듣기 방송은 나오지 못해서 모든 시험이 끝나고 전기가 복구된 후에 듣기 시험을 치게 되었다. 정전이 된 상황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시험을 치는 도중 학생들 입에선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창가 쪽에 앉은 학생들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창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황당하고 답답해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허겁지겁 1교시 시험을 봤다.

점점 날이 밝아지고 2교시 수리영역시간이 반 정도 지난 시각. 띠리링~ 소리와 함께 학교 전체에 불이 켜졌다.  몇 번을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 한 후 완벽히 불이 켜졌다. 시험도중 여기저기서 '오~'라는 탄성과 함께 2교시 시험을 마쳤다.

2교시 시험 후, 점심시간이 되자 복도에는 학생들이 몰려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 방송국에서 우리학교가 정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를 나왔다. 학생들은 이런 일로 방송국이 우리학교까지 찾아온 것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촬영 팀은 시험을 치르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나무가 쓰러진 교정을 찍은 후 촬영을 마치고 돌아갔다.

3교시 외국어 영역의 듣기는 정상적인 방송을 했다. 그러나 정전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볼륨도 일정하지 않고 소리가 이상하게 들리는 경우도 있어서 학생들의 많은 탄식을 자아냈다. 알고 보니 우리가 1교시 2교시를 치르는 동안 근처 학교에 가서 외국어 영역 듣기 방송 CD를 복사해왔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나니 더욱 황당했다.

길고 긴 4교시 사회탐구영역 시험이 끝난 후 우린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닌. 1교시 때 걷어갔던 OMR용지를 다시 돌려받고 언어영역 시험지를 다시 꺼낸 후, 아까 듣지 못했던 언어 듣기 방송을 들어야만 했다. 듣기 방송 후 학생들은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냥 시험을 봐도 긴 시험인데 정전에다 듣기방송까지 불안했으니. 정말 길고 긴 시험시간을 보냈다.

선생님은 쓴 웃음, 고3 우리들은 황당 웃음

선생님들은 교직생활 몇 십 년 만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며 쓴 웃음을 지었고, 우린 황당해서 웃음을 지었다. 정말 무척 '긴~' 하루였다. 미니 수능이라 하는 9월 모의고사 때 이런 경험을 해보는 학생들이 몇이나 될까. 우리 학교 고3들에겐 신기하기도 했지만 너무나 가혹했던 하루였다.

비록 이런 황당한 일 때문에 영향을 받아 시험을 망쳤다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진짜 수능이 아니니. 남은 70여 일 동안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는이야기#태풍#곤파스#고3 9월 모의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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