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공식적인 이별을 통보한 듯한 8월의 끝날, 그리고 어정쩡하게 눈치를 살피던 가을이 보란 듯이 문을 열어젖힌 9월의 첫날. 어제와 오늘 양일은 두 계절에 각기 아쉽고 반갑단 인사를 건네면서, 이제쯤 내 마음 속에도 수확할 열매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홀로 차분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 하면 그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보는 행위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일 만큼 중요한 것이 때때로 멈춰서는 일입니다. 바람의 냄새가 바뀌거나 한 해가 지고 시작될 때, 특히 마음이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은 사실 살면서 숨을 쉬는 것만큼 중요한 한 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8월) 31일 대구에서는 모처럼 대도시의 풍경을 음미하며 여유자적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중앙로로 이동해 도도하게 하늘을 가린 고층빌딩 사이를 걷다가 영화 관람을 했는데요.
이날 본 영화는 유해진·천호진 주연의 <죽이고 싶은>이었습니다. 대략의 줄거리를 매우 간략히 소개하면 죽을 짓을 한 두 남자가 서로를 죽이고 싶어 죽을 힘을 다 한다는 이야기인데, 개성 강하고 연기력 탄탄한 두 배우 덕에 시종일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영화 현실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자체보다 더 신선하고 즐거웠던 자극은 남들 일하는 시간에 한산한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본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었습니다. 뜻한 바 있어 자발적 비경제활동인구로 편입한 지 반 년이 넘었건만 이 쾌감은 반감되질 않습니다. 마치 본인에겐 아주 간단한 문제를 옆사람이 몇 시간째 골머리를 앓으며 풀고 있을 때와 비슷한 심경일 겁니다. 이 '특별한 일탈'은 지금 제 삶의 방식이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는지를 기억하게 합니다.
지난해 12월 단지 안정적이라는 것 외에 어떤 장점도 찾을 수 없던 직장을 관두고 지금 제가 되찾은 것은 내가 나라서 행복한 자신감, 진정 깨어있단 생동감, 돈과 상관없이 열정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 가치있을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로운 삶'이 얼마나 스스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하는지 나날이 깨닫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두어 시간 대구시내를 거닐었는데 틀에 박힌 도시 풍경에 금세 넌더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곧장 포항오는 버스를 탔습니다. 가끔 아무것도 얽매이는 것 없이 여행을 하면서도 습관적인 경쟁심이나 의무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마음 가는대로 훌쩍 다시 떠남으로써 진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9월의 첫 아침은 포항에서 맞았습니다. 원래는 전날 도착해 호미곶 노을을 보며 8월과 작별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오후 5시경 다시 호미곶행을 시도했으나 또한번 허탕을 쳤습니다. 이번엔 버스를 거꾸로 타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아쉽게 여름과의 운치있는 작별신은 놓쳤지만 가을과의 낭만어린 재회신은 가능하리라 생각했는데 내리고보니 듣도 보도 못한 양덕이란 버스 종점이었습니다. 잠시 당혹스러웠지만 오랜만에 벌인 유치한 실수라 그것마저도 재미있었습니다. 돈과 시간을 버리며 바보짓을 했다 자신을 원망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일부러는 찾아오지 않을 낯선 곳을 알게 된 기회라 하겠습니다. 마침 저녁 기운 감도는 하늘에 활짝 편 손바닥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었습니다. 신께서 '안녕!'이라고 한 걸까요?
돌아오는 길엔 숙소 옆 대형마트에 들러 비타민을 보충했습니다. 시식코너에 놓아둔 포도를 양껏 따먹었는데요, 알뜰하고 건강한 여정을 위해선 이런 뻔뻔함 정도는 미덕이라 하겠습니다(다행히 지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신 내일 아침 식빵에 넣어먹을 오이 하나를 샀는데 가격이 무려 1650원! 야채값이 말그대로 금값인데, 우려해야 할 것은 당장 추석상이 아니라 이런 결과를 야기한 이상기후와 우리 사람의 생활패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숙소 창문 너머로 '자유의 여신상'이 보입니다. 분명 대구에서 포항으로 왔는데 미국이 이만큼 가까웠던가요?(웃음). 기어이 9월은 오고 말았고, 이제부터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서두를 건 없지요. 언제나 초심을 지키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이제 다시 머묾에서 나아감으로 여정의 방향을 전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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