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제 밤 세 시간 불은 자장면을 먹었다. 물론 고민했다. 사천 원과 불은 자장면 사이에서 3초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하나로 덩어리진 면들을 차분하게 푸니 풀어졌다. 지금 내 볼은 갓 구운 빵처럼 살짝 부풀었고 작아진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평소의 절반이다. 이런 나에게서 쉽게 버려진 백만 원이 있었다. 그 백만 원으로 꿈을 찾으려 했던 십여 년 전의 이야기다.

4차원 소녀 꿈 많은 성인이 되다

선생님 때문에 화났다는 이유로 빼먹은 수업시간,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자던 4차원의 소녀는 꿈 많은 스무 살이 됐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되풀이 되던 지겨운 시험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내 인생을 좌우할 뭔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고민해야 했고 고민하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만 같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전선으로 뛰어 들어야 했던 난 방황했다. 내가 생각한 사회와 현실의 것과는 쉽게 채울 수 없는 거리가 있었고, 난 매일 그 중간 세상 어디쯤에서 눈을 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있어야 할 바로 그곳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스스로를 기특해 하며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그곳에서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 시절의 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며 3개월 동안 근무한 그 회사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만 같았다.

딱 한 달을 야무지게 쉬었다, 물론 놀고 먹진 않았다. 종로의 햄버거 집에서 알바도 하고 그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셀프 커피 전문점도 뛰었다. 그러면서 알아 본 두 번째 직장에는 신중을 기했다. 사람들 너머로 오는 좋은 자리도 거절했고 선생님께서 추천하셨던 취업 자리도 마다하며 선택한 회사는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곳이었다.

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하고 싶은 뭔가를 찾았다. 학원을 다니고 꾸준히 공부해 전문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 뭔가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돈을 벌고 싶었다. 비디오 촬영기사, 광고 디자인, 막 도입되기 시작한 컴퓨터 학원에서는 엠에스 도스부터 시작해야 했다. 난 학원들을 돌아다니며 필이 꽂히는 것에 촉을 세웠다.

드디어 백만 원으로 꿈을 파는 학원을 만나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광고에 이런 글이 있었다. "당신도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 후광이 번지는 단 한 마디의 문장이 나를 카피라이터의 폼 나는 세계로 뛰어들게 했다. 드디어 찾은 거다.
  
진심으로 다시 생각하면 찾은 거라고 믿고 싶었다. 단돈 백만 원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카피라이터를 만들어 준다는 거다. 그것도 전화 한통으로 그것도 백만 원만 통장에 입금하면 말이다.  나도 뭔가가 될 수 있다면 그게 카피라이터가 되기를 바랐다. 나도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반년도 넘게 헤맨 나에게 이제야 찾아온 빛나는 그 꿈을 백만 원 따위에 놓칠 수가 없었다. 난 그날부로 밥을 먹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지만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쓰던 난 며칠을 설득했다. 돈은 무조건 아껴야 잘 산다는 엄마에게 백만 원을 타내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작은 돈이 아니다. 그 시절 50만원의 초봉을 받는 시절이었으니 우리 집에서는 말 할 것도 없이 큰돈이었다. 그래도 꿈을 위해서가 아닌가. 난 떼를 쓰기 시작했고 내가 카피라이터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백만 원 때문에 딸의 인생을 어둠으로 몰고 간 개념 없는 엄마 때문일 거라는 원망 앞에 엄마는 결국 거금 백만 원을 내주셨다.

그 순간 난 이미 카피라이터였다. 백만 원만 입금하면 그가 누구든 1년 과정의 수강을 허했으며 첫날은 친절하게도 고기까지 사줬다. 그곳에 모여서 신나게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백만 원을 입금한 자들이었다. 백만 원으로 꿈을 산 성인들이 그곳에 있었던 거다.

1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은 커다란 건물 강당에서 수업을 듣게 됐다. 유인물을 받고 매일 7시부터 1시간의 강의를 듣는다. 광고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수업을 했고 외부에서 초빙된 사람도 있었다. 백만 원으로 꿈을 산 성인들은 그곳에서 광고에 대해 설명하는 그들의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그곳의 원장님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1년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카피라이터가 돼 하늘을 날던 나는 퇴근 후 친구를 만나기도 했고 동료들과 술을 한잔 하기도 하며 학원을 빠지기 시작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는 듯이.

1년 치 학원비와 함께 서서히 사라지는 카피라이터의 꿈

난 결국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백만 원으로 카피라이터의 꿈을 샀던 많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목돈을 내고 이렇게 흐지부지 되면 안 되지 않겠냐는 말을 남기며 조금씩 사라져 갔다.

회사 일을 마치고 또다시 지하철을 갈아 타가며 매일같이 학원엘 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간다한들 자장가처럼 들리는 노곤한 선생님의 목소리를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청춘 뒤로 백만 원의 꿈이 사라지고 있었다.

백만 원은 꿈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날린 돈이었다. 카피라이터를 꿈꾼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됐으며 그 중 과연 몇 명이나 광고계로 진출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과 나태함에 후회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학원은 관인등록도 되지 않았던 곳으로 커다란 건물 한 층을 빌려 그저 한 달간 임대를 했던 것이었다. 엄마께 죄송했지만 난 크게 깨달은 여자였다. 학원비는 한 달만 받는 곳에서 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억나는 수업내용은 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따봉광고'는 망한 광고라는 사실이다. 그 시절 사람들 모두 따봉을 외쳤지만 정작 무슨 제품의 광고인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따봉이라는 이름의 제품을 출시했다고 들었다. 백만 원으로 아는 체하는 광고 상식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성인이 된 사람에게는 꿈을 묻지 않는다. 이미 어른이 됐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난 성인이 되면서 더 많은 꿈을 꾸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꿈 대신 직업을 묻는 어른의 세상을 안 순간 난 많은 사람들의 꿈은 장롱 가장 깊은 서랍 속에 넣어둔 채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카피라이터가 될 수 있다!" 매력적으로 날 유혹했던 신문광고 한 줄을 잘못만난 덕에 난 돈을 잃었지만 한 뼘씩 어른이 돼 갔을 것이다. 내 인생의 백만 원. 비록 그 돈으로 꿈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녹록하지 않은 세상에 꿈을 찾겠다며 덤비던 젊은 시절 첫 번째 오류였다.

덧붙이는 글 | <잘못된 만남> 응모작



#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