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육아휴직급여가 인상되고 육아휴직을 신청할 수 있는 자녀의 나이도 만 6세에서 8세로 늘어날 전망이라는 소식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육아휴직 대신에 신청할 수 있는 근로시간 단축청구권도 강화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를 두고 있는 부모나 부모 품에 있고 싶은 어린 아이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양육비 부담 때문에 자녀 낳기를 꺼리는 부모에게도 작은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결혼과 동시에 시작한 맞벌이 생활, 그 18년의 애환을 써 봅니다.
육아휴직 꿈도 못 꾸던 시절, 출산휴가도 눈치 보며 설설저의 맞벌이 생활은 결혼과 동시인 199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뒤돌아보니 심정적으로 성적표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 집이 지금처럼 비싸지는 않았지만 '태생적 부자'가 아니고서는 그때도 집 마련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전세로 시작하는 마당에 내 집을 가지려면 맞벌이는 필수였습니다. 평범한 직장을 다니던 저와 아내는 당연히 집 마련을 위해 직장을 계속 다녔습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워 가면서 말입니다. 결혼한 이듬해가 되어 지금은 고 1인 첫 딸이 태어났습니다.
아내는 처가에서 2주 정도 몸조리를 하고 큰애를 데리고 서울로 왔습니다. 다행히 아내가 출산휴가가 두 달이 되어 우리 가족은 정말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당시 불행하게도 육아휴직은 없었습니다. 출산휴가도 눈치를 보며 써야했던 시기였습니다.
아이 얼굴을 떠올리며 퇴근시간을 기다리던 때였습니다. 그 와 중에도 두 달 이후 아이를 맡길 곳을 찾느라 궁리를 해야 할 때는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음이 착잡해서인지 어린이 집에 맡겨진 아이에게 보모가 수면제를 분유에 타 먹였다느니, 때렸다느니 하는 걱정스러운 신문기사만 유독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갓 태어난 우리 딸에게도 엄마와 아빠의 품이 익숙해진 때였습니다.
두 달 만에 이별, 주말 상봉에 눈물만 줄줄고민하던 우리는 궁리 끝에 처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출산과 함께 승용차로 2시간 넘게 걸리는 지방에 아이를 맡기니 여간 섭섭하고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말이면 만사 제쳐두고 아이를 보기 위해 처가로 내려갔습니다.
관광지인 처가는 주말이면 행락 차량이 꼬리를 물어 저녁에 출발해도 새벽에 도착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우리 딸을 빨리 볼 수 없는 상황이라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모들의 보살핌 속에 우리 아이는 잘 컸습니다.
주말에 내려가면 어찌나 좋아하는지 항상 해맑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저녁 아이와 작별을 하려고 하면 내 품에 안긴 아이가 무엇을 아는지 옷깃을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떨어지기 싫은 슬픈 눈동자로 말입니다.
저희 부부는 아직도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차에 타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둘이 벌어 좋겠네"에 "정말, 죽겠습니다"결국 저와 아내는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어도 같이 살자." 처가에 맡긴 지 6개월 만에 큰아이를 서울로 데리고 왔습니다. 보모 아주머니가 집에 와서 아이를 돌봐주면 좋겠지만 맞벌이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이를 집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보모 아주머니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추운 겨울, 깊은 잠에 든 아이를 품에 감싸고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를 반복했습니다. 여전히 보모아주머니 댁 앞에서 헤어지는 아이의 눈에는 늘 눈물이 젖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속사정도 모르고 "둘이 벌어 좋겠네"라고 했습니다. 저의 대답은 늘 똑같았습니다. "정말, 죽겠습니다" 정말 몸은 몸대로 지치고 마음은 마음대로 아픈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힘든 나날에 맞벌이 청산, 이게 행복이었네그렇게 어려운 하루하루 맞벌이 생활을 이어가 큰애가 두 살이 되었을 때 둘째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임신 초기 힘들어하던 아내는 6개월이 되었을 때 정들었던 직장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를 하게 되어 불가피하게 다른 보모아주머니에게 큰 애를 맡겼는데, 매일 우는 아이를 보니 너무 안쓰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아내에게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가뜩이나 임신으로 힘겨워 하던 아내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직장을 접었습니다. 내집 마련의 꿈을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벅찬 현실이었습니다.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니, 저도 정말 많이 너무 편했습니다.
늘 '아이가 잘 노는지', '아주머니가 잘 봐주고 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하는 걱정을 하고 살다 아내가 집에 눌러 앉으니 정말 날아갈듯 홀가분했습니다. 조금 부족해도 행복했던 시기였습니다.
"아빠, 우린 왜 매일 종일반이에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둘째가 태어나고 아내는 둘째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둘이 떨어지는 게 싫어 큰애가 다니는 유치원에 작은애도 한살 올려 보냈습니다.
평일에도 다른 집 아이들은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저와 아내가 퇴근이 늦어 우리아이들은 해가 뉘엿뉘엿 해서야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엄마의 손에 집으로 돌아가는 다른 아이들이 부러웠던지 딸아이가 "우리는 왜 종일반이에요?"하며 물을 땐 마음이 아팠습니다.
토요일도 휴무가 없어, 어김없이 유치원에 갔습니다. 퇴근 후 유치원에 가면 몇 명 되지 않는 친구들과 놀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맞벌이 때문에 어떤 상처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탈 없이 유치원을 마쳤습니다.
저출산 대책으로 부모들이 덜 미안하길...작은 애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부터 엄마, 아빠가 자리를 비워도 둘이 잘 놀았습니다. 둘 낳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둘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들도 중·고생이 되어 많이 컸습니다. 둘이 밥도 챙겨먹고 집안일도 더러 도우며 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왔을 때 반겨 줄 사람이 없고 간식을 챙겨 줄 엄마가 없어 미안한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을 조금은 이해하는 것 같으니 덜 미안합니다. 지금도 아내는 앨범을 뒤적이다 큰애가 태어나 엄마 품에 벗어나 있던 시절의 사진을 보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합니다.
"그땐 너무 미안했어".
아무쪼록 저출산고령화 대책의 일환으로 나온 육아휴직 연장 등의 방안들이 맞벌이 부모와 엄마, 아빠의 품이 그리운 아이들에게 작으나마 보약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금이라 덜 미안하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