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 진보 원로로 '참여정부 기관장 퇴진 논란'의 중심에 있던 김윤수(74)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에 대한 '해임' 처분은 위법하다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제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9일 김윤수 전 관장이 "계약 해지가 무효임을 확인해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계약해지 무효확인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해임으로 원고에게 미지급된 임금 8193만 원(계약기간)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윤수 전 관장은 임기만료(2009년 9월)를 1년여 앞둔 2008년 11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계약해지를 통보받았다. 김 전 관장이 마르셀 뒤샹의 작품인 <여행용 가방>을 사들이면서 계약 체결 전 구매결정 사실을 중개상에 알리고, 관세청에 신고하지 않는 등 관련 규정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다.
이에 김 전 관장이 국가를 상대로 계약해지 무효확인 소송을 냈으나, 1심인 서울행정법원 제5부(재판장 이진만 부장판사)는 지난해 7월 "국가가 제시한 계약해지 사유가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문화부가 해임처분의 근거로 삼았던 계약해지의 중요 부분은 모두 항소심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고법 제9행정부(재판장 박병대 부장판사)가 지난 4월 1심 판결을 뒤집고 김 전 관장의 손을 들어준 것.
항소심 판결 내용을 요약하면 김 전 관장에 대한 채용계약 해지는 효력이 없어 무효인 만큼 계약해지 이후 계약기간 만료 시까지의 급여 합계 8193만 원을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 작품수집지침 제4호 및 제8호 위반 여부= 국가는 김 전 관장이 계약체결 전에 <여행용 가방>의 구매결정사실을 중개상에 알린 것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김 전 관장이 2005년 5월 30일 미술품 중개상 R사에게 '국립현대미술관은 마르셀 뒤샹의 <여행용 가방>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담긴 공문을 보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 김 전 관장이 공문에서 미술품에 대한 진위 확인과 가격협상이 선행돼야 함을 조건으로 제시한 점, ▲ R사가 2차례에 걸쳐 김 전 관장에게 5월31일까지 미술품 구입 여부를 알려달라는 통지를 했는데,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위 작품을 구매할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던 상황에서 만일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면 R사가 다른 미술관에 작품을 팔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 등을 들어 공문을 발송할 필요가 있었다고 봤다.
이에 재판부는 "이런 제반 사정을 고려하면, 김 전 관장이 공문을 보낸 행위가 '작품 수집의 가부를 미리 약속한 것'이라거나 '최종 수집결정 이전에 심의결과 및 내용을 외부에 유출시킨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해 국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미술품에 대한 제안가격 및 구입가격 결정상의 잘못 여부 = 국가는 또 "김 전 관장이 미술품 가격에 대한 충분한 조사를 거쳐 작품수집심의위원회에 제안가격을 상정하고 구입가격을 결정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미술품의 최종 구입가격이 객관적으로 적정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으나, 이 사건 미술품 수집여부에 대한 심의 및 구입가격의 결정과정에서 김 전 관장이 임무를 소홀히 하거나 규정을 위반하는 등 뚜렷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먼저 <여행용 가방> 미술품은 전 세계적으로 수량이 한정돼 있고,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예술성과 보존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는 예술품의 가격을 객관적이고 일률적으로 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외국에서 뒤샹의 <여행용 가방> 시리즈 작품이 미술품 경매를 통해 일부 거래된 사례가 있기는 하나, 이 사건 미술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 거래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고, 뒤샹의 작품이 국내에는 단 한 점도 없으며, 이 사건 미술품은 오로지 단 한 점뿐이므로 시장가격이 존재하지 않아 전문가의 시가 감정조차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결국 재판부는 "김 전 관장이 이 미술품에 대한 감정가격, 유사한 거래실례 가격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계약상대방인 R사로부터 직접 제안 받은 견적가격을 기준으로 예정가격을 결정한 것을 위법하다고 볼 수는 없다"며 "게다가 구입 작품의 적정가격을 산정하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체심의위원회의 업무로서 오로지 김 전 관장에게만 가격결정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김 전 관장이 미술품 거래과정에서 뒤샹 작품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나OO 박사로부터 진품을 확인한 점, 비록 우편을 통해 거래되기는 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품을 매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동안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한 미술품 매입이 부적절하다고 지적된 바도 없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단지 김 전 관장이 미술품 계약에 있어 '표준계약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국가계약법 시행규칙을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관세법 위반 여부 = 재판부는 "이 미술품은 세율이 0%인 무관세 품목으로서 굳이 부당한 이득을 얻기 위해 세관장에게 신고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 위임 전결 규정상 작품의 운송 및 통관은 학예실장의 전결사항인 점, 비록 위 미술품의 통관과정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측이 확인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다소 부적절한 업무처리가 됐다고 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미술관장인 원고에게 곧바로 관세법위반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관세법위반죄의 죄책을 묻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 채용계약의 기초가 된 신뢰관계의 파괴 여부 = 국가는 위와 같은 여러 사유를 들어 김 전 관장이 국가공무원법 제56조가 정한 법령의 준수 및 성실의무를 위반했고, 또 계약직공무원규정 제7조 제4호가 정한 복무상 의무를 위반했으므로, 이로써 채용계약의 기초가 된 신뢰관계가 파괴된 만큼 해임처분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원고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서 <여행용 가방>을 구입함에 있어 통관절차에 다소 부적절한 업무처리가 된 것을 미리 막지 못한 점 정도를 제외하고는 달리 비난할 만한 사유가 있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국가공무원법이나 계약직공무원규정이 정한 복무상 의무를 위반했다고 할 수 없다"며 "따라서 원고가 계약상의 의무를 위반함으로써 채용계약의 기초가 되는 신뢰관계가 파괴됐음을 전제로 한 피고의 채용계약 해지는 효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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