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헌부에 들어온 산홍은 흐늘대는 몸을 맵시있게 흔들며 콧바퀴에 앵앵이 소릴 담아 며칠 전의 일을 누에처럼 뽑아냈다. 그것은 사내의 주검이 발견되기 하루 전의 일로 정순왕후 먼 친척뻘이란 김씨 성 쓰는 자와 오경환이 마련한 자리였다. 아직 반촌에 사는 채직동이 나타나기 전이었다.

"형조좌랑 영감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 사온서(司醞署)에 있던 장가(張哥)의 아들 놈이 한양에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사온서 장가라면, 잡직에 있던 장칠삼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쪽 일이 끝나자 그 잔 지리산 뱀사골로 들어가 그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아는데?"
"물론 그랬지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 자의 아들이 한양에 나타났단 말인가?"

"아마, 도화서 화원 취재에 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순왕후께서 소격서를 다녀오시던 길에 보림원 출입구에서 그 잘 봤다고 했습니다. 마마께선 장칠삼이 아들을 한눈에 알아봤답니다. 제 아비 모습을 영락없이 빼닮았으니까요. 한데, 그 자 곁에 젊은 놈이 있었는데 나중엔 마마께서 보림원에 계신 정경을 초벌로 그린 놈이랍니다."

"흐음, 왕후마마의 보림원 행차를 말인가?"
"그렇습니다."

"함께 있던 놈은 누군가?"
"도화서 화원, 혜원 신윤복(申潤福)이라 들었습니다. 들리는 말엔, 장가가 단원을 찾아와 도화서에 들어온 것으로 돼 있는데 이후 신윤복과 터놓고 지낸 사이라 합니다."

"흐음."
"장칠삼의 아들이 삼화루 기생들과 자주 어울리는 건 입담이 구수하단 말이 있습니다만, 내가 알아 봤더니 상대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뛰어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어느 때인가 그 자가, 산홍(汕鴻)이 등의 삼화루 기생 예닐곱이 앉은 자리에서 내길 청했답니다. 자신의 친구 중에 화원이 있는데 산홍이를 그리고 싶어 한답니다. 산홍이가 그 사람을 만날 것인지 아니 만날 것인지를 알아맞춘다면 '전모(氈帽) 쓴 기생'의 모습을 그려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상대가 누군지는 말했다던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결과는 장칠삼이 아들놈의 말대로 됐으니 놀랄 일이 아닙니까."
"오호!"

"삼화루의 산홍이라면 미색은 곱지만 억세기로 소문난 기생입니다. 산홍이가 콧방귀 뀌며 그런 놈을 왜 만나느냐고 소리치며 나갈 때만 해도 그곳에 있는 기생들은 깔깔대며 웃어댔지만 사내는 정색하여 장담하더랍니다."

가만히 허공으로 향하는 시선 속에 그 날의 정경이 수놓아졌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산홍이가 그 사낼 만나고 와서 그림을 그리면 내게 술 한 상 내오겠느냐?"

"만약 그 반대면요?"
"너희들 종이 돼 일 년 동안 세숫물이며 온갖 허드렛 일은 거들어 주마."

"정말이지요?"
"그렇다니까."
"좋아요, 산홍이가 사낼 만난다면 우리가 술을 내올게요."

"그럼, 술을 내오거라. 산홍이는 그 사낼 만날 것이다."
"어째서요?"

"너희들은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을 아느냐."
"그게 뭔데요?"

"음경락과 양경락이다. 입술 아래는 임맥, 위는 독맥인데 쉽게 말해 하나는 감독하고 하나는 신임한다는 뜻이다. 임맥이 발달한 건 명태고 독맥이 발달한 건 독수리나 상어를 예로 들 수 있다. 윗턱이 발달한 것일수록 양적(陽的)이며 공격적이지."

"그게 산홍이와 무슨 상관있나요?"
"있고말고. 산홍이는 임맥이 발달했으니 그녀가 싫다 하고 나갔으나 지금쯤 내가 말한 사내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싫다 했지만 정녕 싫어서 한 말은 아니닌까. 자, 어서 술을 내오거라."

과연 모든 건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무슨 일인지 산홍이는 그 사낼 만나 얘길 나누어 '전모(氈帽) 쓴 여인'을 그리게 되었다. 붓질은 혜원이 했지만 그림을 그리도록 다릴 놓아준 건 칠서였다는 말이다. 산홍이의 얘길 듣고 나서 정약용은 다른 쪽으로 얘길 틀었다.

"너는 보림원이 무엇하는 곳인지 아느냐?"
"들은 것은 있지요."
"말 하거라."

"상주인가 전주인가 어디에 큰 절이 있답니다. 그곳에서 독경(讀經)하는 큰 스님이 한양에 오시면 머무는 곳이라 합니다. 불력이 뛰어나 스님을 보는 것만으로 칠보(七寶)를 얻는다고 소문이 있어 가끔 왕후마마께서 그곳을 다녀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청금상련(聽琴賞蓮)에 대해 들어 봤느냐."
"양반님네의 기생 희롱하는 그림 아닙니까?"
"그 그림을 혜원이 그렸다는 걸 아느냐?"

"예에. 사실은 장칠삼의 아들 칠서(七鼠)란 자가 절 찾아와 귀엣말을 속삭이지 않겠어요. '거문고를 들으며 연꽃을 감상하지 않겠느냐'고요. 쇤네는 영문을 몰라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더니 그림을 그린 화원을 만나면 아주 귀한 비밀을 안다지 않겠어요."

"귀한 비밀?"
"쇤네도 그 말이 이상해 화원을 만나 그림에 대해 물었어요. 사내 셋과 여인 셋이 가야금을 들으며 연꽃을 구경하는 그림이었는데···, 혜원(蕙園)이 쓴 화제(畵題)가 문제라는군요."

"화제라···."
정약용은 가만히 곱씹었다.

자리엔 손님이 가득 차고(座上客常滿)
술 단지엔 술이 빌 새가 없네(酒中酒不空)

'술이 빌 새가 없다'는 대목도 문제였지만 혜원은 술 단지의 술을 준(樽)으로 써야 하는데 주(酒)로 쓰고 붓을 놓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혜원의 박약한 학문 실력을 꼬집었지만 정약용은 이를 가볍게 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산홍이가 돌아가는 길을 멈칫대더니 뜻밖의 말을 토해놓았다.

"나으리, 혜원이란 화원 말입니다. 청금상련을 그린 후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술 마시며 고함을 친답니다. 자신이 쓴 화제(畵題)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큰 웃음으로 비웃기도 하고요. 쇤네에게 미인도를 그려주겠다고 약속한 화원이 전날에 마신 술로 오질 못하자 칠서란 자가 <송낙(松絡)>이란 그림을 들고 찾아왔다 변을 당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기생방에 떠다니는 소문엔 차마 믿음이 가지 않는 게 많습니다. 양반님네들은 처음엔 쉬쉬 하며 그곳에서 하는 말이 새어나갈 새라 입단속 하지만, 술기가 오르면 너나 할 것 없이 어떤 얘기든 꺼내니까요. 지난 봄, 궁인이 나와 기생차림으로 술 자릴 한 모양입니다."
"그 아이가 상련(賞蓮)이네."

"아, 아십니까?"
"정순왕후 처소에서 일하는 아인데 어인 일로 그런 자리에 나왔는지가 지금껏 비밀이었네. 술자리에 나올 땐 기생방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됐으니 초야권을 치를 욕심있는 양반님네가 속이 달아 안달복달한 모습을, 그림을 그린 화원의 눈엔 그 얼마나 한심하고 추악한 양반님네의 꼬라가진가 싶었겠는가. 그날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날이 밝자 그 기생은 왔던 곳으로 돌아갔지."

"어딘데요?"
"이 사람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터고."
"그렇군요. 궁으로 돌아갔군요."

"그 궁인은 숨 쉬는 구멍이 물젖은 종이에 막혀 숨을 거뒀네. 정순왕후가 말하길 체벌을 받다 숨을 거뒀으니 아무도 간섭 말라 하여 지금껏 덮어 둔 일이네. 잠시 전, 자네 말을 들으니 칠서란 젊은이가 살해되던 날 본래 그곳에 오기로 한 화원은 혜원이었다고 했는가?"

"아, 예에.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어쩔까 싶습니다만···, 이따금 형조좌랑 영감을 찾아오는 가마가 있었습니다. 우리집 아이들은 가마에 탄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라 했거든요."
"여인인가?"

"아, 예에. 몸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내는 시중에서 맡아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이었어요. 더구나 좌랑 영감을 찾아왔으니 예사 분은 아니지요. 그런데 그 분이 기생의 옷을 입고 자신을 그려줄 화원을 찾는다지 뭡니까."

"화원을?"
"그렇게 돼 혜원이란 분이 삼화루에 들려 미인도를 그렸는데 어쩐 일인지 <송낙(松絡)>이란 그림에 대해 스스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어요. 송낙에 나오는 여인이 어쩌면 화장을 곱게 한 미인도의 그 여인이 아닌가 하구요."

[주]
∎전모(氈帽) ; 기생들의 나들이 모자
∎화제(畵題) ; 그림을 그리고 쓴 글이나 시
∎청금상련(聽琴賞蓮) ; 혜원의 풍속화


#추리, 명탐정, 정약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