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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일) 하루 저만치 갔던 여름이 다시 온 듯했습니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30℃를 웃도는 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마치 그립던 연인이 돌아오자 그제야 '사랑은 끝났다' 실감할 때와 같았습니다. 며칠 차가워진 바람에 여름이 갔음을 아쉬워해놓고 창밖의 열기를 느낀 순간 몸서리를 쳤기 때문입니다.

 

날은 덥고 몸도 피곤해 정오에 숙소를 나와 그러고도 근처 PC방에서 두어 시간 머물렀습니다. 그 사이 우울한 발라드 삼매경에 빠졌는데, 하마터면 감정의 늪에서 못 헤어날 뻔 했습니다. 북안면에 위치한 만불사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선 건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서너 시경이었습니다.

 

 

영천터미널에서 버스로 30여 분쯤 달려 절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북안터널을 잇는 고가도로 하단 측면에 거대한 현판이 보였습니다. 그 규모에 놀라 어안이 벙벙한데, 안내소를 지나자 이번엔 성인 키 만한 불상들이 삼열종대로 끝도 없이 정렬해 있었습니다. 그 길 좌측에는 용천지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것은 법당을 진리 가득한 배에 비유해 그 배가 정박하는 항구로써 불자들의 악업을 씻어내는 곳이라 합니다.  

 

 

호위무사 같기도 한 불상들의 엄호를 받으며 사찰 내부에 들어서니 실로 사방 풍경에 위용 넘쳤습니다. 제일 먼저 좌측 산 위로 언뜻 봐도 상당한 크기의 아미타대불 상반신이 보였고, 고개를 바로 하니 그간 본 적 없는 이색적인 금탑이 서 있었습니다. 이 3개의 탑이 인도 부다가야에 있는 대탑을 축소해 만든 인등대탑입니다.

 

탑 한 기에는 1만 5000개의 인등을 밝힐 수 있는데, 이 인등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겠다는 증표라 합니다. 그리고 인등대탑 둘레에는 아기 형상을 한 동자상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낙태나 유산 등을 이유로 제 인연을 맺지 못한 영가들을 위로하고 부모가 그 죄를 참회할 수 있다 합니다.   

 

 

인등대탑과 유자영가동자상을 지나면 3층 규모의 범종각이 나옵니다. 이 역시 국내 최대 규모인 동시에, 그 안에는 무게 13t, 높이가 3.6m에 달하는 세계 최초 황동만불범종이 들어가 있습니다. 범종의 안과 밖에는 불사에 동참한 불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 황동만불범종을 3번 치게 되면 그 어떤 악업도 소멸된다고 하는데, 살면서 지은 죄를 이리 쉽게 떨칠 수 있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래도 염치없는 짓이려니와, 이렇듯 죄가 쉽게 사해지면 뻔뻔한 사람들은 점점 더 금수 같은 짓을 할 것이 자명합니다. 이미 숱한 전례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천국 불신지옥'도 마찬가지지요. 어느 종교든 근거없고 이기적인 인간의 소망을 신의 말씀이라 왜곡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처음 설법을 전파한 녹야원과 사슴농장을 거쳐 납골묘인 극락도량 왕생탑묘를 지나면 절 입구에서 그 상반신을 올려다봤던 아미타대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대불 또한 33m 높이로 국내 최대 장신불입니다.

 

쉼없이 나타나는 거대 불상과 전각들에 휘둥그레진 눈이 감기질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허한 마음이 커지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행여 불상은 있으되 부처는 없고, 부(富)는 넘치는데 불심은 희박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자가 다 도둑은 아니겠으나, 배곯는 생명이 넘쳐나는데 제 집 안에 과한 재물을 쌓으면 그 또한 죄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화려하고 웅장한 절을 둘러보며 점점더 세상 모든 재물과 권력을 버리고 맨몸으로 수행한 부처의 삶과는 멀게 느껴졌습니다. 

 

만불사 최대·최초 기록행진은 아미타대불에서 내려와 만나는 황동와불열반상에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열반을 형상화한 이 불상은 길이 13m, 높이 4m로 국내 최대 와불입니다.

 

 
산을 내려와 다시 인등대탑 곁에서 보살 한 분을 만났습니다. 분명 밥을 먹고 나온 듯했는데 "공양을 할 수 있겠냐"는 여행자의 물음에 고갯짓 한 번으로 그럴 수 없다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다른 쪽 공양실 입구에는 '누구나 공양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안내글이 큰 서체로 적혀 있었습니다. 의아했습니다.
 
원래는 만불사에서 밤을 보내고 고요한 새벽 풍경을 다시금 보고 싶었으나 사찰 측에서 허락하질 않아 그러질 못했습니다. 절 구경을 끝냈을 때는 겨우 오후 7시가 가까웠으나 설상가상 막차도 끊긴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귀가가 늦은 어느 여보살님의 차를 얻어탈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비가 많이 올 거라는데, 상황 봐서 움직여야겠습니다. 오늘밤은 터미널 건너 여인숙에서 잠을 청합니다. 싼값에 혹해서 들어와 보니 불결하기 짝이 없는 곳입니다. 침자국으로 범벅된 베개는 벽 한 구석에 집어던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다시 나가 잠자리를 구할 여력은 없으니 견디는 수밖에요. 집이 그립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네이버와 다음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태그:#가을여행, #만불사, #인등대탑, #용천지, #영천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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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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