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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일이 너무 고되다는 걸 어릴 때 경험한 탓에 난 그 농촌을 박차고 뛰쳐나왔는지도 모른다. 지금야 농사도 기계가 대부분 하고 있지만 옛날엔 사람이 전부해야 하니까 식구가 많아야 했다. 어리면 어린대로 다 할 일이 있어서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농사일로 잔뼈가 굵었다.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책 보따리 팽개치고 들로 나가야 했다. 보고 배운 것이 농사일이다 보니 고등학교도 농고를 다녔고 대학도 농학을 전공했다. 농사를 지어보니 쌀 한 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아서 난 밥 먹을 때 한 알도 허투로 남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농부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가 쌀이다. 그 쌀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초근목피 했던 우리나라가 아니었던가. 쌀은 귀하니까 꽁보리밥 먹고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이런 걸로 배 채우고 대충 끼니를 때워가며 자라온 우리의 과거 모습이다. 

근데 지금 우리나라는 쌀이 남아돌아서 처치 곤란이다. 쌀값이 자꾸 떨어지니 농부들은 풍년도 반갑지 않다. 얼마 전엔 농촌진흥청 연구원이 벼 우수 품종을 개발해 더 많은 쌀이 생산되게 하여 죄송하다고 인터뷰 한 기사를 봤다. 참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다. 먹을 게 지천에 깔렸으니 누가 쌀을 그렇게 고마하는가.

아니 쌀 뿐만 아니라 사방에 먹을 것이 널려서 사람들이 눈에 뵈는 대로 먹다보니 비만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먹으니까 살이 되는 거지 먹지도 않는데 살이 찐다는 말은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농촌을 떠나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됐지만 농촌은 나의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거기서 인생의 쓴 맛 단 맛 다 경험했다. 어쩌면 지겨워서 기억 속에서 싹 지워버리고 싶은 추억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사람 사는 사회다.

시골에는 아직도 형님이 농사를 짓고 있다. 농토도 제법 많아서 거기서 생산되는 쌀이 꽤 되는데 역시 판로가 걱정이다. 강화 쌀, 아니 강화에서도 배 타고 또 들어가는 교동도는 청정지역이다. 공장이란 것이 단 한 군데도 없이 오직 벼농사만 해 먹고 사는 동네이다. 옛날엔 농약도 많이 쳤는데 지금은 병해충이 많지 않아서 거의 한 두 번 정도나 칠까 말까 할 정도로 유기농에 가까운 농사여서 물론 이천 쌀도 좋지만 강화 교동 쌀이 품질로는 대한민국 선두주자이다.

그 쌀을 나는 우리교회에 갔다가 놓고 이를테면 직거래를 하는 것이다. 수요자가 많진 않지만 한 가마라도 더 소비시켜야겠기에 직거래를 운영하고 있다. 근데 마트가 아니어서 여긴 배달도 없고 예쁜 포장도 없고 가격도 거의 변동이 없다. 시세가 바뀔 때마다 형님이 알려주는데 여기가 뭐 전문 쌀가게도 아니고 그거 자꾸 바뀌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내가 귀찮아서 알았다고만 하고 한 번 알려 준 값으로 계속 팔고 있다. 그러니 나는 엉터리 쌀장사다. 그래도 와서 가져가는 사람들은 우리 고객들이다. 아는 사람만 아름아름 사 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중간 이윤을 남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심부름꾼이다.

곤란한 점이 있다. 쌀이 얼른 얼른 안 나가면 재고가 된다. 여름 장마철엔 꼭 벌레 나고 상하기도 한다. 그거 내가 다 먹을 수도 없고 팔자니 미안하고 반품하자니 그것도 그렇고 할 수없이 금년엔 처음으로 내 차로 반품을 시켰다.

그 쌀을 본 외지인이 한마디 한다. 

"아, 여기 농약 많이 안 쓰시나 보네요. 농약 많이 쓰면 벌레 잘 안 나는데..."

그렇지만 소비자야 당장 눈에 깨끗하고 바구미 없어야 상품가치를 높게 보지 그 깊은 뜻을 알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는 사람은 채소도 일부러 벌레 먹은 거가 농약 안 친 거라고 그런 것만 찾는 이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나저나 이 남아도는 쌀 걱정이 태산이다.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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