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중국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장춘, 다롄, 뤼순 등지를 지난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답사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안중근 의사 순국날인 2010년 3월 26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에 즈음하여 <영웅 안중근>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져, 이미 출판된 원고를 다소 손보아 재편집하고, 한정된 책의 지면 사정상 미처 넣지 못한 숱한 자료사진을 다양하게 넣어 2010년 11월 20일까지 43회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기자말
[제5일 2009년 10월 30일]
10루불이 없어 당한 황당함
02:00, 잠에서 깼다. 역구내 철로에 객차가 있었기에 창밖은 플랫폼의 등불로 그리 어둡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객차 화장실에 갔더니 무지막지하게 잠겨 있었다. 아마도 열차가 서 있을 때 용변을 보면 오물이 역구내 철로에 쏟아지는 것을 막고자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객차 출입문도 꽁꽁 잠겨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반대편 출입문 곁 승무원실로 가자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승무원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면서 복도로 나와 화장실을 안내해 주려고 했다.
그가 열쇠로 문을 열기에 나는 잠을 깨운 게 미안해서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다녀오라고 했다.
역 대합실에는 화장실이 보이지 않았다. 역무원에게 묻자 바깥의 다른 건물을 가리켰다. 불이 켜진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장실 어귀에 노파가 앉아 있었다. 창문에 보니 10루블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지갑에서 1달러짜리 지폐를 건네주자 그는 손을 흔들었다. 다시 중국 화폐 10위안을 건네자 또 손을 흔들었다. 난감했다. 미국 달러는 대부분 나라에서는 다 통용이 되는데(북한에서도) 오로지 루블화만 받겠다고 고집하니 그 노파를 설득시킬 만큼 말도 할 수 없었고 시간 여유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재빠르게 객차로 돌아와 승무원에게 내 지갑을 열어 보이며 "Change money" 하자 그는 지갑에서 120위안을 집고는 500루블을 건네주었다. 내가 "Small money"라고 말하자 그는 알아들었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10루블짜리 지폐 한 장을 더 건넸다. 나는 지갑에서 그에 해당하는 위안화를 더 가지고 가라니까 그는 됐다고 하면서 얼른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곰곰 생각해 보니 부쩍 화가 났다. 역 구내 공공 장소에 무료 화장실이 없다니. 이 나라에서는 돈이 없는 사람은 용변도 볼 수 없다는 말인가.
소변 한 번 보는데 세 차례나 객차에 들락거리고 거기다가 애꿎은 승무원 잠까지 깨워 더욱 미안하고 슬그머니 화도 났다. '집 나가면 생고생'이라고 하더니 내가 영판 그 짝이었다.
환전도 하였거니와 역 앞 가게에서 먹을 것이라도 살까 살폈으나 늦은 밤이라 가까운 곳은 문이 닫혔다. 좀 먼 곳에 붉은 전등불이 켜 있었으나 그쪽으로는 발길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해외에서도 늦은 밤 으슥한 골목길은 사고 위험지대가 아닌가. 오랜 학교생활의 체험에 따르면 사고를 당한 학생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굳이 가지 말라는 뒷골목을 기웃거리다가 매를 맞거나 돈을 빼앗기곤 했다.
아마 우범지대는 세계 어디나 비슷할 것이다.
겨울날씨로 밤공기가 찼다. 객차는 자체로 페치카 시설이 돼있어서 승무원들이 이따금 석탄을 집어넣어 실내 전체가 훈훈했다.
다시 잠을 청했으나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억지로 잠을 청하기보다는 시트를 걷고 일어나 객차 내 탁자를 펴고는 가방에 싸온 책을 꺼냈다. 왜 조선은 일본에게 망했을까?
왜 조선은 망했을까?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번역한 김준 선생은 그 머리글에서 다음과 같이 울분을 토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매천야록>을 읽은 것은 절산재사에서 한창 경전을 탐독하던 19살 때였다. 그때 나는 이 망국사(亡國史)를 한 줄 두 줄 읽어가다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누를 수 없어, 탁료수배(濁醪數杯, 막걸리 여러 잔)를 마시고는 청등벽라(靑燈碧羅, 얇은 비단을 씌운 푸른 등불)가 우거진 뜨락을 배회하면서 장탄식을 하곤 하였다. 그것은 내가 갑자기 우국지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강토가 호리(狐狸, 여우와 살쾡이) 같은 이민족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그 참상이 한 서생으로 하여금 울분을 터뜨리게 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배움이 적은 나 역시 10여 년째 항일유적을 답사하면서 참고하고자 근현대사나 독립운동사를 읽을 때면 그와 같은 울분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을 보면 망할 수밖에 없는 왕조였다. 다만 백성들의 힘으로 새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이민족에게 송두리째 나라와 강토를 빼앗긴 게 하늘에 사무치는 한으로 안타까웠다.
우리가 이웃 나라인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것은 이미 400여 년 앞인 임진왜란 때였다. 우리는 일본을 '왜(倭)' '왜국(倭國)' '왜구(倭寇)' 등으로 업신여기면서 지난날 우리 문화를 그들에게 전수해준 우월감에 도취하여 그들을 얕보았다. 그러는 새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 서구에서 입수한 조총을 만들어 대륙 정벌의 야욕을 불태웠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기미를 감지하고서도 전혀 대비치 않다가 일본이 쳐들어온 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내주고 선조 임금은 의주로 도망치기 바빴다.
곧 평양까지 점령당하자 선조 임금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 가려는 것을 충신 유성룡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 될 것이며 후일 백성들을 어찌 보려고 하십니까? 지금 동북의 여러 도가 남아 있고, 머지않아 호남지방에 충의의 선비들이 봉기할 것인데, 어찌 경솔히 명나라에 가십니까?"
선조 임금은 유성룡의 충간에 압록강을 건너려던 몽진 행렬은 멈췄지만 전란에 죽어가는 백성들의 안위보다 제 목숨 구걸에 급급한 못난 임금이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당시 조선 인구 500만 가운데 약 300만이 희생된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왜군의 총칼에, 역질에, 난리 중 먹을 게 없어 굶어죽었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았다. 이때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들은 도망 다니기 바빴고, 왜군을 패주케 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義兵) 승병(僧兵) 때문이었다.
부패의 극치 - 삼정(三政) 문란
이런 참혹한 전란을 겪고도 당쟁과 사화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다시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았다. 인조 임금은 허겁지겁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갔으나 곧 청군에 포위되고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에 도륙을 당하고 젊은 여자들은 청군의 군막에 붙잡혀가 노리개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인조 임금이 한강나루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게 하는 삼배구두의 예를 올리며 항복 문서를 바쳤다. 그때 수많은 여자들이 청나라로 붙잡혀 갔는데 그들이 돌아오자 '환향녀(還鄕女)'라고 돌팔매질한 사대부들이었다.
조선 왕조는 당쟁과 사화가 잇달았는데, 이는 국리민복의 정책 대결이 아닌 지배계층들 간의 관직 쟁탈전, 정권 쟁탈전으로 숱한 인재들을 희생시켰다. 오랜 당쟁의 마지막 산물은 세도정치로 조선 왕조는 이미 기울기 시작하였다. 순조(23대), 헌종(24대), 철종(25대)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잠깐 풍양 조씨)들의 60년간 세도정치는 조선 왕조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등 삼정(三政)의 문란에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켰다.
토지세를 거두어들이는 전정의 경우, 무려 39종에 이르는 각종 부가세는 관리의 식사비, 여비, 가마 수리비, 감사의 유흥비, 지방 양반들의 족보 발간비, 서원의 제사 비용 등 온갖 명목으로 피땀 흘려 지은 백성들의 곡식을 뺏어갔다.
군정의 문란상을 보면 '백골징포(白骨徵布)'라 하여 죽은 자의 군포를 자손에게 물리는가 하면, '인징(隣徵)'이라 하여 도망자의 군포를 이웃에게, '족징(族徵)'이라 하여 도망자의 군포를 친척에게까지 물리는가 하면,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 하여 갓난아이들을 군적에 올리고 군포를 물렸다.
환정, 환곡(還穀)은 본래 백성들의 구휼(救恤) 책으로 기근이 들거나 춘궁기 때 관청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추수 때 이를 돌려받는 제도로 이자를 붙이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점차 이자가 붙기 시작하여 관청의 고리대로 변질되어 관리 아전들의 축재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그 무렵 환곡을 통한 수탈, 협잡, 농간의 방법은 100여 가지에 이르렀다는데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백성들에게 빌려 줄 때는 썩은 쌀, 겨와 모래가 반 넘어 섞인 쌀을 주고는 돌려받을 때는 백옥 같은 흰쌀로만 돌려받았다.
거기다가 나라의 요직은 세도 정치가들이 독식하자 백성들의 원한은 하늘을 찔러 평안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경상도 진주민란 등 전국으로 파급하여 경상도에서 20군데, 전라도에서 37군데, 충청도에서 12군데를 비롯하여 경기도 황해도, 함경도까지 번져갔다.
대원군의 등장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막을 내린 듯하였으나, 곧 이은 여흥 민씨의 등장은 군대가 난을 일으키는 임오군란에까지 이르렀고, 그래도 정신 차리지 못한 집권층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백성 착취는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 조성오 <우리역사이야기 ․ 2> 40~44쪽 참고
관군이 농민군에 밀리자 조정은 청국에 농민군을 진압할 원병을 청하여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이때를 기다리던 일본이 조선에 상륙하여 우리나라를 두고 청일 양국이 각축을 벌였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그 여세로 러일전쟁을 일으켜 영국 미국의 도움으로 승리한 뒤 결국 우리는 1910년 8월 29일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 그리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는 한일병탄을 맞았다.
조선이 망한 데는 이웃 일본의 오랜 대륙 진출의 꿈인 정한론에 따른 야만적 침략에 있지만, 이를 경계치 못한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 '대중화(大中華)'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 '소중화(小中華)'에 안주하다가 지난날 우리 문화의 수혜국인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미꾸라지에게 뭐 물린 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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