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아도, 또 너무 커도 안 된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 중에 변비로 고생하는 '성퉤(가명)'라는 친구가 있다. 짧으면 2-3일, 잠자리가 바뀐 곳에서는 최대 일주일 동안 해결을 보지 못하는, 괴로움이 많은 친구였다. 며칠 전에도 사흘쯤 고생했다고 한다. 다행히 일은 봤지만, 그보다 더 큰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친구의 몸속에서 오래 묵힌 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집 변기가 그만 탈이 난 것이다. 그의 모든 똥을 다 소화하지 못해 변기 목구멍에서 막혀버렸다.
최근 2년 동안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 변기와 수압은 끄떡없나 보다'라고 방심했던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뚜러펑 같은 연장도 집에 없었단다. 아침에 출근해서 밤늦게나 들어오는 친구는 계속적으로 아무 연장도 구입하지 못한 채 그렇게 5일을 버텼다.
문제는, 신기하게도 변기가 막힌 뒤부턴 변비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심지어 오밤중 자고 있는 중에도 똥이 마려웠단다. 집에서는 꾹 참고 있다가 출퇴근길 지하철역이나 회사에서 해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밤중에 '똥'이 곧 나올 것 같다는 신호에는 어쩌질 못해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참혹하여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던 광경
참다 참다 결국 그 친구는 자정을 넘긴 시간에 눈물을 머금고 비닐봉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목구멍이 막혀 얄미운' 변기통에 대충 끼워 맞추고 엉거주춤 앉아 그곳에다 해결을 봤다. 해결보는 것까지야 좋았다. 그러나 뒤처리가 문제였다.
일단 고무장갑을 끼고 비닐봉지 주둥이를 꽉 묶고, 또 다른 봉지를 찾아 여러 번 감쌌다. 그리고 더이상은 생각조차도 하기 싫어 화장실 구석에 버려둔 채 잠을 청했다.
몇날 며칠 묵힐 수가 없어 결국 그는 아침 출근길에 그것을 들고 나가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
아무리 제 똥이라지만, 그리고 아무리 몇 겹의 비닐로 포장했다지만, 손톱만큼 떼어가는 채변 봉투도 아니고, 똥을 덩어리째 들고 출근길을 나서야 하는 친구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을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이해가 갔다.
'똥'.
똥이라는 단 한 글자는 발음 그 자체만으로도 전 세계 아이들을 완벽하게 웃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그렇게 까무러칠 정도로 좋아했던 똥이지만, 어른이 되면서부터는 점점 입에도 쉽게 담을 수 없어서 '큰 거', '변', '응가' 등의 말로 대체하게 되는 단어가 됐다.
강마에가 했던 것처럼 '당신은 똥·덩·어·리'라고 하면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로 우리는 '똥'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또 오밤중에 비닐봉지에 똥을 눈 사실은 참혹을 넘어 비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이전에 '그것은 내 뱃속에 품었던 것이고, 내 일부분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닐봉지 사건의 주인공, 성퉤는 일주일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변기를 고쳤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똥 누는 것, 그 자체에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온다고 했다. 감사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똥을 눈 뒤에는 변기 속에 얌전히 누워 있는 변의 색깔도 보고, 또 똥이 잘 내려가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했다. 똥과 대면하는 시간이 좀 더 길어진 것이다.
쑥쑥 내려가는 똥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단다. 문득 나도 한 번쯤은 변기 속으로 고맙게 빨려 들어가는 똥에게, 한때는 나의 일부였던 것에게 작별 인사라도 날려야 되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보태는 말로, '똥'에 관한 엄청난 에피소드를 들려준 성퉤(가명)에게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친구야~ 너의 소중한(?) 경험 때문에 나도 내 똥을 사랑하게 됐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