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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시작한 북한 인민군 21개 연대 중 10개 만주 조선인 연대가 있었고, 그들은 해방 직후 만주를 중심으로 중국의 국공내전을 통해 단련된 조선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한국전쟁 연구에서 만주 조선인들의 삶과 투쟁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한국전쟁 연구 시야 만주로 확대

겉그림 <또 하나의 한국전쟁>
겉그림<또 하나의 한국전쟁> ⓒ 역사비평사
<또 하나의 한국전쟁>은 이런 관점에서 출발한다.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반도 중심에서 벗어나 만주까지 확대 시켰다. 만주는 고구려와 발해의 무대이기도 했지만, 일제시대 동포들의 삶터였고,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투쟁 현장이었다.

이들의 삶은 해방 후까지 지속된다. 연변, 길림, 목단강시에서 꾸준히 한글신문을 발행하면서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고,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 온몸으로 맞서 지속적인 투쟁을 이어나갔다. 

사활을 건 싸움(국공내전: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 필자 주)을 벌이고 있었던 중공으로서는 후방의 안전이 필요했다. 청태종이 관내로 들어가기 전에 한반도 문제를 정리했듯이, 중공 역시 배후의 안전이 필요했기에 북한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바로 이런 시점에 북한과 만주의 조선인들이 상호 연계해 북한 정부수립 축하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가맹자치공화국 수립이나 연변의 북한 귀속을 추진했으며 민족대학 설립운동을 강경하게 전개했다. (책 속에서)

만주 조선인들은 해방 후에도 한글 신문을 발행하면서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전개된 신탁통치 반대운동 소식을 듣고 반탁운동을 전개했고, 10월 항쟁에 대한 미군정의 폭행항의운동을 전개했다.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가해서 만주 조선인들의 발언권을 강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연변의 북한 귀속을 추진했다.

일제 패망 이후 팔로군과 함께 만주로 돌아온 조선의용군은 만주 각지의 조선인 무장 세력을 흡수해 조선의용군 부대로 개편했다. 그들은 조국의 38선 분할을 우려 깊게 바라보면서 만주를 기지로 삼아 통일혁명역량을 키우고자 했다. 그 구체적 방법은 국공내전에서 조선청년들을 혁명내전으로 가담시켜 단련시키고, 북한과 연변 각지에 정치군사학교를 세워 혁명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만주기지론'은 실제로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청년들이 이후 입북해 조선인민군으로 편성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북한과 연변의 정치학교에서 양성된 조선인 간부들도 국공내전은 물론 한국전쟁에서 인민군 또는 중국 지원군 간부로 활약해서 실천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연구 시야도 분단의 장벽을 넘어야

조선 후기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해서 한반도에만 머물러 있던 역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까지 확대시켰다. 이런 연구가 뒷받침되어 지금 우리는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주장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분단 체제의 장벽으로 접근이 어려운 북한의 역사, 사회주의 독립운동사, 만주 조선인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역사 연구자들의 시야가 분단의 장벽 안에서만 머물다보면 북한의 역사, 만주 조선인의 역사가 우리 역사에서 영영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염인호/역사비평사/2010.8/38,000원



또 하나의 한국전쟁 - 만주 조선인의 '조국'과 전쟁

염인호 지음, 역사비평사(2010)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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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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