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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4년이 걸렸습니다. 눈치 안 보고 회사에 휴가 가겠다고 말하기까지 말입니다. 그동안 밥 벌어먹겠다고 이 악물고 버틴 건 아니었는데, 상사 눈치보고 다른 사람들 스케줄 맞추다 보니, 어찌어찌 시간이 나질 않았습니다. 따지고보면 못 갈 이유는 없었지요. 그래도 쉽지 않다는 거 아시죠? 물론, 누구나 하는 핑계지만요.

그러니 그 얼마나 해외여행에 대한 갈증이 묵혀있었는지 모릅니다. 더 이상 삭히면, 냄새날 것 같았습니다.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바지에 오줌을 지릴 것 같았습니다. 그때, 배낭을 쌌습니다. 오키나와로 가자고 한 건 순전히 '막걸리'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7월 7일부터 17일까지, 무슨 배짱인지 열흘이나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여행 기사랑 비교하면 질이 좀 떨어집니다. 솔직히, 다른 여행기들은 언제나 여행지에 대한 본문만 나오고, 포장하려는 인상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행지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로만 가득차 있습니다. 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행을 해야 하나요? 여행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일 텐데 말입니다.

다르게 쓰고 싶었습니다. 여행의 부스러기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행지에서 겪은 찌질했던 일들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여행은 결코 만만하지 않고, 그렇게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너무 몰랐다, 오키나와
일본으로 복귀된 지 40년도 안됐다고?
독립된 국가, 류큐왕국 ▷ 일본 본토 합병(1879) ▷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 전투로 현민 희생 ▷ 2차세계대전후 미군 통치(1945-1972) ▷ 일본 복귀(1972)

미군기지가 전체 면적의 20%나? 아니, 왜?
오키나와는 전체 면적의 약 20%를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상상이 가시나요? 오키나와의 면적은 일본 전체의 0.6%에 불과한데, 전체 주일 미군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밀집해 있습니다. 일본 중앙정부는 미군 기지가 있다는 것을 배려해,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키나와의 경제수준은 광역단체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군요.

오키나와지도에 표시된 미군기지
▲ 미군기지 오키나와지도에 표시된 미군기지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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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전투에서 20만명이나 죽었다고?
1945년 3월 말. 역사상 보기드문 격렬한 전쟁의 불꽃이 오키나와 섬을 뒤덮었습니다. 90일간 계속된 철의 폭풍은 섬의 모습을 바꿨고, 문화유산은 파괴됐습니다. 무려 20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키나와전은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현민을 총동원한 지상전이었는데,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최대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안타까운 건, 일반주민의 전사자가 군인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입니다.

제주하고 닮은 점이 많다고?
오키나와와 제주는 섬이라는 자연환경부터, 국가 경제의 1%정도를 차지하면서 관광으로 먹고 산다는 경제적인 구조까지 닮았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2차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강요받은 것도 비슷하지요.

다만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반면, 제주도는 2차 세계대전이 몇 달 일찍 종료돼 전쟁의 참화는 없었습니다. 아니,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전개된 냉전의 와중에 엄청난 비극을 겪고 말지요. 다른 점이라면 대규모 군사기지가 있냐 없냐일 겁니다. 이마저도 제주해군기지가 들어선다면, 빼닮게 됩니다. 안타깝습니다. 굳이 닮지 않았으면 하는 아픈 역사에 군사기지의 불편함까지 더해지질 않길 바랍니다.

오키나와에 가기 위해 '막걸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유감스럽게도, 공부였습니다. <오키나와 현대사>, <전장의 기억>, <종속국가 일본>,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경계의 섬>, <오키나와와 평화> 등등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거기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내가 읽은 소설책 중 오키나와가 배경이었던 <남쪽으로 튀어>와 <심청>까지 말입니다. 아니 왜? 학점 따러 가는 것도 아니고 유학 가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여행가는 거지, 학점 따러 가니? 공부는 왜...

한국에 소개된 오키나와 관련책. 소설 책도 있습니다
▲ 오키나와 관련 책 한국에 소개된 오키나와 관련책. 소설 책도 있습니다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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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는 대학원에서 오키나와 관련 수업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제주와 닮았다고 했고, 배울 게 많다고 했습니다. 제주는 해군기지 건설로 아직도 몸살을 앓고 있는데, 오키나와는 하늘과 땅, 바다에, 미군기지가 이미 들어서 있습니다.

오키나와 본토 전체 면적의 약 20%가 미군기지입니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한데, 주일 미군기지는 일본 전체의 75%가 오키나와에 밀집해 있다고 합니다. 일본 중앙정부는 미군 기지를 고려해 막대한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천혜의 관광자원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오키나와의 경제수준은 광역단체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행의 기본입니다
▲ 오키나와 기본지식 여행의 기본입니다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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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반적으로 여행가기 전에 공부하라면, 누가 가겠냐는 말입니다. 답답했습니다. 솔직히, '오버'라고 여겼습니다. 여행은 머리를 식히러 가는 거라고 믿고 있었고, 제 입장에서는 더더욱 절실한 요구였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어를 공부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이우에오, 사시스세소~, 히라가나는 물론 가타가나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막걸리'는 영어 좀 굴린다고 버텼습니다. '스미마셍, 아리가또, 다이조부, 이꾸라데스까'면 된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면서 '막걸리'는 고리타분하게 공부했습니다. 문제는 그 정도가 심하다는 데 있습니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내게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막걸리'는 오키나와 현지 사람들을 가르칠 수준에 도달해있었습니다. 뭐야, 재수 없죠?

그런데 그 공부가 현지 사람들과 고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현지 사람들이 놀라 박수를 쳤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나 일본 반환 등의 굵직한 사건은 물론 미군 여중생 성폭행 사건, 오키나와 국제대학 헬기추락사건, 얀바루 숲 등의 환경문제까지 오키나와의 최근 현안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습니다. 책으로, 그러니까 오키나와의 현대사 사건을 연도까지 줄줄 외고 있으니 현지 사람들이 공짜로 밥을 사줄 수밖에요.

역사책 영웅집에서나 있을 법한 치바나 쇼이치 상

쇼이치상(가운데)을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일본어를 오오무라상(왼쪽)이 막걸리군(오른쪽)에게 한국어로 통역해주고 있습니다.
▲ 쇼이치상 쇼이치상(가운데)을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일본어를 오오무라상(왼쪽)이 막걸리군(오른쪽)에게 한국어로 통역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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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나 쇼이치 상은 특히 그랬습니다. 일본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난 7월 15일, 쇼이치상은 장애가 있는 딸과 함께 민박집 봉고차를 몰고 나타났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박손님인 우리를 데리러 온 것이었습니다.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 머리는 짧은데 히끗히끗하고 수염도 자르지 않아, 야생적인 터프함이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예순이 넘었다고 했는데, 도무지 '막걸리'가 설명해준 인물과는 연결이 되지 않더군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요?

때는 바야흐로, 1987년. 오키나와에서 일본전국체육대회가 열릴 때였는데, 그는 요미탄손에서 열린 여자소프트볼 경기장의 일장기를 끌어내려, 불을 태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의 마을 주민들 간의 학살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쇼이치상은 요미탄손에서 태어나고 자라 슈퍼마켓을 운영해오다 90년대 말부터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요미탄손 의회 총무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의원이랍니다.

우린 쇼이치상과 좀 어정쩡하고 데면데면하게 인사했습니다. 역사책 영웅집에서나 있을 법한 일을 실행한 인물이었는데, 막상 보고나니 너무 친근했습니다. 쇼이치상의 '봉고'를 타고 도착한 곳에는 어른 세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릴 마중 나온 셈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동네 입구 정자나무 아래 모여 장기 두고 있는 인상이랄까요. 주변 풍경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시끄러운 매미소리도 그랬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한 분은 손글씨로 쓴 명함을 건네줬습니다. 쇼이치상의 딸처럼 핸디캡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웃으면서 내 어깨를 아프게 주물렀는데, 알고보니 안마사라고 했습니다. 오호~. 다른 한 분은 일본어 토킹이 전혀 안 되는 우릴 위해 영어 통역을 해줬는데, 쇼이치 상이 일부러 섭외해 오신 분이었습니다. 쇼이치상의 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같은 민박집에 묵고 있는 손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다들 오래된 사이처럼 친해보였습니다.

'맥주인심'은 마냥 감사해요

맥주인심이 좋더군요
▲ 오리온맥주 맥주인심이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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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차에서 내리자마자, 어색할 틈도 없이, 술 한 잔(?) 했습니다. 영어 선생님이 대수롭지 않게 오리온 비루(맥주)를 주면서 마시라고 했습니다. 이게 음료수? 아님 물? 인가 싶어 다시 맥주를 확인할 정도였습니다. 아− 만나자마자 술을 권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오키나와는 제주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해있습니다. 더운 건 두말할 나위가 없고, 습도가 높아 사람이 푹푹 찝니다. '맥주 인심'이 감사해질 수밖에요. 얘길 하다 보니 앉을 만한 의자가 좁아 다 앉지 못하자, 아무렇지 않게 땅바닥에 앉아 얘기를 나눴습니다. 마치 지나가는 차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신경쓰지 말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입니다. 이분들은 친해지는데 있어서도, 격식을 따지지 않는 분들이셨습니다.

'막걸리'가 쇼이치상을 놀라게 한 건 다음날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어 통역을 맡아줄 오오무라 카즈히로 상이 오자마자 오키나와 전투 당시 비극이 일어난 치비치리가마와 동아시아에서 제일 규모가 큰 공군기지인 카데나기지에 가기로 했습니다. 새벽에는 시모쿠가마와 소베통신소를 다녀왔습니다.

'치비치리가마'에서 일본의 가면을 보다

치비치리가마 안입니다.
▲ 치비치리가마 치비치리가마 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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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비치리가마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극이 일어난 곳입니다. 도무지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도 상상이 안 되는 장소입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블랙홀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혼란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20여일 동안 꼼짝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동굴 안쪽에는 유해의 뼈들과 녹슨 칼날, 낫, 주전가 같은 것들이 일부러 모아져 있었습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 곳에서 '막걸리'는 너무나 해박한 지식으로 쇼이치 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쇼이치 상이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가다 멈칫하면, "생후 3개월짜리 아이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라거나, "당시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 상륙 이후 굴을 찾은 날이 4월 1일이죠?"라면서 기억을 재생시켜놓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걸,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막걸리는 아는 걸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 묻고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아이를 죽일 수 있었을까요. 주민들끼리 죽이고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끔찍한 현장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일본정부는 '자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쇼이치상은 자결이란 표현에 치를 떠는 듯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자결을 할 수 있었겠냐고 말이죠.

쇼이치상은 당시의 일본 교육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강조했습니다. 생후 3개월 밖에 안 된 자식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죽은 85명 중 47명이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은, 미군에 대항하라고, 미군에게 붙잡히면 남자는 죽임을 당하고 여성은 강간을 당한다는 식의 '나쁜 교육'때문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일본어와 다른 '오키나와 말'을 하는 사람을 간첩으로 간주할 정도였습니다.

치비치리가마안에서 발견된 유해들입니다
▲ 치비치리가마 유해 치비치리가마안에서 발견된 유해들입니다
ⓒ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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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덧붙이면, 이런 교육의 효과는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로부터 차별을 받은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30년 전 오키나와는 독립적인 왕국으로 말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역사도 달랐습니다. 그런 오키나와가 일본이 되었을때 차별이 생겨났고, 일본사회에서는 오키나와인 뿐 아니라 조선인과 홋카이도인들을 차별했습니다. 이렇게 차별을 당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고, 그래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차별받지 않기위해 오키나와의 말도 버리고, 일상생활도 일본식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정도였습니다.

오키나와와 제주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2차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강요받았습니다. 다만 오키나와는 오키나와전투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반면, 제주도는 2차세계대전이 몇 달 일찍 종료돼 전쟁의 참화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전개된 냉전의 와중에 엄청난 비극을 겪은 것이지요. '막걸리'와 쇼이치상은 제주4·3에 대해서도 많은 얘길 나눴습니다.

'막걸리'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람을 홀렸습니다. 쇼이치상은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게다가 그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것도, 일부러 자신의 민박집에 찾아와 준 것도 고마워했습니다. 반면에 '막걸리'는 역사책에서나 볼법한 쇼이치상을 꼭 만나고 싶어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만큼 공부를 하고 온 보람을 느낀 '뜨거운 만남'이었습니다.

치비치리가마 사건은 무엇?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 본 섬에 상륙한 이후 이 굴로 찾아왔다. 140명 정도의 사람들이 20일 정도 숨어있었다. 처음 2명의 청년이 죽창으로 저항하다가 총을 맞고 죽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공황상태에 빠졌고, 하루 종일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논의를 했다.

다음 날인 4월 2일, 다시 찾아온 미군은 이곳에 일본군이 없음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오면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라는 일본어로 된 종이를 건넸다. 하지만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에 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미군에 대항하라고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미군에게 붙잡히면 남자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여성들은 강간당할 것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미군이 다시 이 동굴로 찾아올 때 첫 죽음이 벌어졌다. '우에치 하루'라는 18세 소녀가 엄마에게 자기를 죽여달라고 말했다. 미군에게 강간당하며 죽기 싫다면서. 그러고는 죽어갔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각자 갖고 있던 칼이나 독약으로 '나도 죽여달라'고 하면서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동굴에 함께 숨어있던 간호사는 독을 주사했고, 농부들은 농기구를 사용했으며, 칼로 찌르는 사람도 있었다. 완전한 패닉상태였다. 이렇게 서로 죽이다보니 85명이 서로에게 죽임을 당했다.

<2편에 계속>


태그:#오키나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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