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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촌 입구에서 바라본 윤동주 생가. 윤동주가 15세까지 살던 생가는 1981년에 무너지고, 1994년 복원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명동촌 입구에서 바라본 윤동주 생가. 윤동주가 15세까지 살던 생가는 1981년에 무너지고, 1994년 복원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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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는 기와를 얹은 고풍스러운 한옥으로, 어렸을 때 동네 부잣집을 떠오르게 했다. 북방식이어서 대청은 없지만, 마당이 넓고 칸 수가 많아 생활이 넉넉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래된 기와에서만 자란다는 와송(瓦松)들은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중순이었다. 그러나 갖가지 모양의 구름조각들이 떠가는 명동촌 하늘은 한국의 가을 하늘처럼 청명했다. 주위를 맴도는 고추잠자리들이 가을 분위기를 더해주었고, 금방이라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것처럼 느껴졌다. 참 좋았다.

만주기행 다섯째 날(8월 16일) 오전 10시쯤 명동촌에 도착,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 15만 엔 탈취기념비, 3·13희생자 묘역을 참배하고, 독립 운동가이자 연변조선족자치주 첫 주장(州長)을 지낸 주덕해가 소년 시절 살았다는 집터를 들러보고, 시인 윤동주 묘소로 향했다.

길가의 코스모스. 지난 8월16일 만주 명동촌 입구 풍경입니다. 가을 나들이 행렬 같지요.
 길가의 코스모스. 지난 8월16일 만주 명동촌 입구 풍경입니다. 가을 나들이 행렬 같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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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에서 묘소까지 20분 정도 걸렸는데, 무덥기는 해도 주변에 풀과 나무가 많고 여럿이 대화하며 걸으니까 즐거웠다. 환하게 웃는 새색시 얼굴처럼 활짝 핀 길가의 코스모스들은 아련하고 재미있는 추억담 모티브가 되어주었다.

누군가가 코스모스에 얽힌 얘기를 꺼냈다. 가을에는 꽃잎을 책갈피에 넣어 보관했다고 했다. 코스모스가 활짝 핀 들길을 걷는 낭만을 지금 젊은이들은 모를 거라는 얘기도 나왔다. 세상이 미치니까 코스모스도 미쳤는지 시도 때도 없이 핀다는 말에는 폭소가 터졌다.

대문 앞의 암소. 외롭게 보이지만, 밤만 먹으면 논밭을 갈아야 하는 소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편한 시간일지 모르지요.
 대문 앞의 암소. 외롭게 보이지만, 밤만 먹으면 논밭을 갈아야 하는 소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편한 시간일지 모르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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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걷는데 보기 드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체격이 좋은 암소 한 마리가 농가 대문 앞에서 집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외롭게 보이긴 했지만,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가족이 모두 밭으로 일하러 나갔는지 집안엔 고요가 흘렀다. 소는 사람들을 보고도 편한 자세로 엎드려 멀뚱멀뚱 바라만 볼 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전날 아침에 차도에서 버스를 막고 서 있던 소가 생각났다. 옛날 개구쟁이 사진을 보는 것처럼 웃음이 나왔다. 

윤동주 묘소 가는 길. 참으로 평화스럽게 보입니다. 행복하게 보이기도 하고요. 만주는 황토가 약간 검고 윤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윤동주 묘소 가는 길. 참으로 평화스럽게 보입니다. 행복하게 보이기도 하고요. 만주는 황토가 약간 검고 윤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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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서 풀 뜯는 송아지와 어미소들. 옛날이 흔히 보던 풍경이지요. 한국에서는 거의 사라진 모습들을 만주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언덕에서 풀 뜯는 송아지와 어미소들. 옛날이 흔히 보던 풍경이지요. 한국에서는 거의 사라진 모습들을 만주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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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풀냄새와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퀴퀴한 분뇨 냄새는 시공을 50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똥통이 많은 참외밭에서 서리할 때 풍기던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꼬마들은 냄새가 지독하다며 코를 막으면서도 즐거워했다.

그래도 검붉은 빛을 띠는 황토 길이어서 구수한 흙냄새가 지독한 분뇨 냄새를 조금 감해주었다. 언덕에 방목해 놓은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광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옛날 시골 길을 걸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멀리서 바라본 모아산. 귀엽게 생긴 언덕으로 봤는데요. 해발 500m가 넘는다고 합니다.
 멀리서 바라본 모아산. 귀엽게 생긴 언덕으로 봤는데요. 해발 500m가 넘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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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을 한참 걸었더니 다리가 아팠다. 잠시 쉬면서 사방을 둘러보니까, 들녘이며 마을이며 전망이 그만이었다. 청잣빛 하늘을 지붕 삼아 떠가는 구름은 20여 년 전에 배웠던 현철 노래 '내 마음 별과 같이'를 흥얼거리게 했다.

"산 너울에 두~둥실 홀로 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알~리라 내~ 마음을 부평초 같은 마음을, 한 송이 구름~꽃을 피우기 위해, 떠~도는 유랑별처럼, 내~ 마음 별과 같이 저~하늘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나리."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해서 자꾸 불렀다. 가사를 1절만 외우고 있는 게 아쉬웠다. 노래에 '하늘', '별'이 들어가서인지 조금 전 전시관에서 구입한 윤동주 시집 제목(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이 떠오르면서 시를 읊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짙은 녹색 크레파스를 칠해놓은 것처럼 보이는 야트막한 산등성이들, 그 아래로 펼쳐지는 들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옥수수밭에서는 알갱이가 촘촘히 박힌 팔뚝만한 옥수수들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었다. 

다 좋은데 어디가 북쪽이고 어디가 남쪽인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아무리 처음하는 외국여행이라고 하지만, 중국 지도를 챙겼으면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을 거라며 자조 섞인 탄식이 절로 나왔다. 조금 있으니까 박영희 시인이 일행들과 올라왔다.

"저 멀리 어린아이가 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둥그런 산 보이시죠? 그게 '모아산'입니다. 일송정에서 봤던 모습과 약간 다르지요. 더 가깝게 보이고요. 모자를 얹어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모아산'이라고 했답니다. 저 모아산을 넘어가면 연길입니다. 왼쪽은 화룡이고 오른쪽은 훈춘 앞바다 가는 길이고, 그곳에 훈춘벌이 있지요. 용정과 연길을 분기하는 산이 바로 모아산입니다. 저 고개를 넘어서면 용정입니다. 밀짚모자를 씌워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박 시인의 설명을 듣고 가늠해보니까 방향감각이 대충 잡혔다. 머리에 지도를 그려보니까 조선족 자치주 도시들이 모아산을 감싸고 있었다. 정상에 오르면 연길시와 용정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해란강을 끼고 비암산에 우뚝 서 있는 일송정도 보일 것 같았다.

윤동주 묘소는 일반 차량이 접근하기 어려워 한국 관광객들도 잘 찾지 않는다는 가이드 말대로 비포장에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했다.

윤동주 시인 묘소에서

윤동주 묘소. 하늘과 구름, 나무와 잡초까지 외롭게 누워있는 한 저항시인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윤동주 묘소. 하늘과 구름, 나무와 잡초까지 외롭게 누워있는 한 저항시인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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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 묘는 동산공원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앞이 탁 트여 전망이 좋았다. 1년 내내 햇볕이 쬘 것 같았다. 용정시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공원묘지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붉은색 음각으로 십자가 모형을 새겨놓은 비석이 여기저기에 많았다.

윤동주가 명동교회를 세운 외삼촌 규암 김약연의 영향을 받아 유아세례를 받았고, 1945년 2월 일본 감옥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3월초 이곳에 묻혔다는 기록을 보면 기독교인들이 공원묘지를 오래전에 조성한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상여를 따라 놀러다녔던 공동묘지가 떠올랐는데, 잔디(띠)가 한국처럼 많지 않았고, 토질도 차진 맛이 없고 퍼슬퍼슬했다. 한국 흙이 찹쌀이라면 만주 흙은 멥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국립묘지로 이장하고 싶다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도 있었다. 

누가 심었는지, 묘 옆에 살구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묘를 지키는 수호신 같았다.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살구를 좋아해서 그것을 아는 친인척이 심어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985년 묘를 찾기 전까지는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물론 고향인 용정 사람들도 윤동주 이름도 시(詩)도 묘소도 몰랐다고 한다. 중국 역사만 배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매년 탄생(12월30일)일에 '윤동주문학상' 시상식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한단다.

저항시를 쓰고 민족운동을 했다는 죄로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용 주사를 맞으며 초췌해졌을 윤동주 모습이 그려졌다. 동시에 몸서리가 쳐지면서 일본에 대한 저주와 분노가 치솟았다.

윤동주는 스물여덟 살에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얼마나 살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 땅에 뿌린 문학의 씨앗은 시간이 갈수록 아름답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일행들과 봉분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윤동주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심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오는 길목이어서 송몽규 묘에도 들렀다.

윤동주와 고종사촌으로 몇 달 간격으로 명동촌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에 입학했고, 대학도, 독립운동도 감옥생활도 함께했으며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23일의 시차를 두고 죽어 동산공원에 묻힌 송몽규는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던 문인이라고 했다.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용정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20분 두만강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문시를 향해 출발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높았으며, 하얀 목화솜 같은 구름 조각들이 떠가고 있었다.

윤동주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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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종안


태그:#윤동주 묘, #동산공원, #모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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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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