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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에서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사람은 사무직 종사자입니다. 그 다음이 서비스업, 전문가, 무직, 학생, 관리자, 단순 노무, 농·림·어업 순인데 사무직 종사자가 농·림·어업 종사자보다 자살률이 두 배나 높죠. 자살이 개인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요인 때문에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부분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9년 한국에서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만 5413명. 매일 42.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어떤 사람들이 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일까.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9월 29일 열린 '사회학 고전읽기' 특강 첫 시간에서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이 속한 사회의 통합 정도나 규제 정도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라며 "개인의 환경 등은 자살의 주 원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교재로 이날 오후 7시 30분부터 2시간여 동안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진행된 이날 강의에서 김 교수는 "한국 사회는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으면서 현대 사회에 걸맞은 도덕적 권위를 갖지 못한 아노미 상태"라며 "한국 사회에 걸맞은 도덕적 가치를 세우고 사회 양극화를 해결하지 않으면 자살률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회가 병이 들면 개인도 병이 든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사회학 고전읽기'가 지난 9월 29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열렸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사회학 고전읽기'가 지난 9월 29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열렸다. ⓒ 권우성

<자살론>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켐이 사회학적인 연구 방법에 따라 19세기 말 유럽의 자살 원인을 다룬 책이다. 사회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단 구성된 사회에는 개인들의 총합을 초과하는 '사회적 사실'이 있다고 보았던 뒤르켐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의 행위 중 가장 비사회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자살을 연구 소재로 선택했다. 뒤르켐은 이 책에서 유럽의 자살률 통계를 통해 자살이 개인의 심리적 원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뒤르켐은 사회 통합과 사회 규제의 정도를 기준으로 인간의 자살을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과 숙명적 자살의 4가지로 분류했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와 거의 관계를 이루지 못할 때, 이타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과도하게 통합되었을 때 발생한다. 숙명적 자살은 사회 규제가 심할 때,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 규제가 매우 느슨할 때 일어나는데 김 교수는 "4가지 분류 중 개인주의가 심화된 오늘날에는 아노미적 자살이 특히 중요해진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아노미'라는 것은 혼란, 규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뒤르켐이 분류한 '아노미적 자살'은 어떤 사회가 개인의 욕망을 제한하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산업사회가 우리의 물질적인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무한의 욕망을 함께 가지게 되었거든요. 인간이 무한정 욕망을 좇는데 기존의 전통적인 도덕 규범들이 그걸 막을 수 없으니 혼란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혼란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살을 행동에 옮기게 된다는 겁니다."

산업사회에 시작되면서 분업과 함께 찾아온 경제적 번영 때문에 사람들이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는데 이것을 종교나 가족, 국가 등의 전통적인 규범들로 적절하게 제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뒤르켐은 아노미를 근대 산업사회가 가진 병리현상 중 하나로 보았다"며 "'사회가 병이 들면 개인도 병이 든다는 것'이 <자살론>에 담긴 뒤르켐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빠른 발전이 불러온 '아노미 한국사회'

뒤르켐이 <자살론>을 집필하고 활동하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는 자본주의가 격렬하게 발전하던 시대였다. 그는 <자살론>을 비롯한 그의 저작들에서 일관되게 근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문제로 도덕을 꼽았다.

해방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압축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는 점에서 뒤르켐이 활동하던 시기의 유럽과 비슷한 풍경이다. 김 교수는 "뒤르켐의 시각에서 보자면 현대 사회로의 변동이 대단히 빠르게 진행된 반면,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는 없는 아노미 사회"라며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살률은 그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와 산업화에 내재된 '더 좋은 상품', '더 좋은 아파트', '더 좋은 교육'을 위한 욕망들을 우리는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프랑스처럼 일종의 도덕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죠. 한국사회의 도덕적 위기는 혈연·지연·학연으로 상징되는 '유사 가족주의'와 천민 자본주의에 기초한 '이기적 개인주의' 같은 현대사회에 걸맞지 않는 도덕적 가치들이 사회에 뿌리내렸다는 것입니다."

'유사 가족주의'는 가족주의가 가진 비도덕적 성격을 비교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내부집단과 외부집단을 엄격히 구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같은 학교 출신은 내부집단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발생해도 관대하게 대하지만 다른 학교 출신은 외부집단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잣대로 평가하는 식이다.

김 교수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빽'으로 상징되는 혈연·지연·학연이 개인의 성공에 있어 중요하다고 긍정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며 "비도덕적 경향을 부추기는 이러한 유사 가족주의는 사회 도덕의 위기를 부른다"고 지적했다.

유사 가족주의와 함께 김 교수가 문제로 꼽은 '이기적 개인주의'는 개인의 책임은 무시되고 자율만 극대화된 개인주의를 의미한다. 김 교수는 "대다수 개인 행동의 목표가 더 많은 화폐와 더 많은 권력인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개인주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며 "이것은 우리 사회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사회로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른 개인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개인은 아노미에 빠져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한국의 도덕적 빈곤을 가져오는 또 하나의 주요 원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강화된 사회 양극화를 꼽았다. 김 교수는 "현재 한국의 빈부 격차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며 "이러한 빈부격차는 무한 경쟁을 부추겨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

 지난 9월 29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교재로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사회학 고전읽기'가 열렸다.
지난 9월 29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교재로 김호기 연세대 교수의 '사회학 고전읽기'가 열렸다. ⓒ 권우성

"한국 사회에 맞는 도덕적 가치 찾아야"

지난 2009년 한국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자살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자살은 20대~30대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을 차지하고 있으며, 최근 노인층을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한 자살률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한국의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도덕적 가치를 구축해야 한다"며 "2008년에 있었던 촛불집회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세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첫 번째는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 두 번째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평화 사상입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이 이외에도 경제·사회 영역에서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일자리 창출 중심의 경제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강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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