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구의 잃어버린 역사. 1946년 '10월 항쟁' 당시 사진이 언론을 통해 처음 공개되었다. <매일신문>은 5일 <"쌀 달라"시위에 경찰 발포, 대형 유혈참사로>를 통해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10월 항쟁' 사진을 유족회로부터 받아 주요하게 편집했다.

시위 이틀째인 1946년 10월 2일, 대구 태평로 삼국상회(현재 SK주유소)부근에서 경찰이 진압을 벌이고 있고, 왼쪽에는 시위 군중들이 경찰의 발포에 쫓기고 있고 도로가에는 시민 여러 명이 쓰러진 모습. <매일신문>2010년 10월 5일 5면/자료제공 :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 1946년 10월 2일 대구 태평로 시위 이틀째인 1946년 10월 2일, 대구 태평로 삼국상회(현재 SK주유소)부근에서 경찰이 진압을 벌이고 있고, 왼쪽에는 시위 군중들이 경찰의 발포에 쫓기고 있고 도로가에는 시민 여러 명이 쓰러진 모습. <매일신문>2010년 10월 5일 5면/자료제공 :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 매일신문/10월 항쟁 유족회

관련사진보기


대구 '10월 항쟁' 유족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서에서 발굴한 이 사진을 항쟁 64주년을 맞는 올해 10월 1일 위령제를 지내면서 일반인에게 공개했고, 이를 <매일신문>이 지면으로 옮겨온 것이다.

<매일신문>2010년 10월 5일 5면/자료제공 :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 <매일신문>2010년 10월 5일 5면/자료제공 :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매일신문>2010년 10월 5일 5면/자료제공 : 대구 10월항쟁 유족회.
ⓒ 매일신문/10월 항쟁유족회

관련사진보기


제시된 사진은 각각 ▲ 시위 이틀째인 1946년 10월 2일, 대구 태평로 삼국상회(현재 SK주유소)부근에서 경찰이 진압을 벌이고 있고, 왼쪽에는 시위 군중들이 경찰의 발포에 쫓기고 있고 도롯가에는 시민 여러 명이 쓰러진 모습 ▲ 경찰 발포로 민간인 1명이 사망하자 시위 이틀째인 2일 수천 명의 시민들이 시위대에 동참해 대구경찰서(현 대구중부경찰서)로 향하고 있는 사진이다.

그 밑에  세 장은  ▲ 10월 항쟁 투쟁본부로 사용된 건물. 중구 태평로 2가 부근 ▲ 경찰의 총격에 희생된 시민들 사진. 10월 1일, 2일 이틀간 총격적으로 경찰 4명을 비롯해 민간인 18명이상(유족회 측은 24명 이상)이 사망한 사진. ▲ 시위가 확산되자 2일 오후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무장 경찰이 도로변 주택가를 뒤지며 주동자 체포에 나선 모습의 사진이다.

기사에선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대구 10월 항쟁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0월 1일부터 이틀간 굴주리던 시민 수천 명이 쌀을 달라고 요구하며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봉기한 유혈사건"이라며 "1일 오전 노동자 수천 명이 대구역과 대구공회당(현재 시민회관)인근에 집결, 경찰 100여 명과 대치했고, 부녀자와 어린이 등 시민 1천여 명도 대구부청(현 대구시의회 건물)앞에서 시위를 벌였다"고 설명했다.

한편 "격렬한 대치 속에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1명이 사망하자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2일 오후 시위대는 1만 명으로 불어났다. 하지만 미군정의 명령을 받고 강제해산에 나선 경찰은 대구역 인근 투쟁본부 앞에서 발포, 이 과정에 민간인 17명 또는 18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다"며 "미군정의 계엄령 선포로 시위는 진정국면에 들어갔지만 이후 칠곡, 고령, 성주, 영천, 영일 등 19개 군으로 확산되었으며 전국으로 번져 12월 중순까지 계속됐다"고 제시했다.

<매일신문>2010년 10월 5일 5면
▲ <매일신문>2010년 10월 5일 5면 <매일신문>2010년 10월 5일 5면
ⓒ 매일신문

관련사진보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지난 3월 '대구 10월 사건관련 진실규명결정서'를 통해 "10월 항쟁은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위령추모사업 지원 방안 마련' 등 4개 권고사항을 촉구했다"는 점도 밝혔다.

<매일신문>은 해당 기사에서 1946년 10월 대구상황을 '10월 항쟁'으로 기록하는 이유도 설명했다. "대구항쟁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50년간 '10월 폭동'으로 불려왔다"며 "2000년대 들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되면서 '10월 사건'으로 개명됐다"고 밝히고 "본지에서는 사진자료를 제공한 유족회 측 요구에 따라 '10월 항쟁'으로 표기했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참언론대구시민연대(www.chammal.org) 사무국장입니다.



태그:#대구10월항쟁, #매일신문, #46년 당시 사진, #미국국리문서기록보관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