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반도로 내려가는 길, 순천시와 여수시 경계에 율촌면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여수시 율촌면이지만 생활권은 여수와 순천 어느 쪽으로든 적당한 거리에 있다. 율촌면 소재지는 선 하나로 행정구역이 갈린다. 17번 국도에서 벗어나 율촌면으로 들어오다 보면 행정구역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로 여수인 줄 안다.
'율촌'(栗村)하면 떠오르는 건 가을에 잘 익은 토실토실한 밤이다. 옛날에 밤나무가 엄청 많아서 '율촌'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하지만 지금은 밤으로 유명하지 않다. 밤나무 농사를 짓는 곳도 없다. 그 많던 밤나무는 어디로 갔을까? 율촌에서 밤나무가 없어진 사연이 있다.
조선시대 율촌 지역은 순천부 관할이지만 전라좌수영 관할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세금도 양쪽에서 걷어가게 되고, 밤나무가 많은 율촌에서는 밤으로 세금으로 내야 했다. 숙종 때(1687년) 순천부사 이봉징은 좌수영에서 정한 밤 세금이 과다하여 주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밤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했고, 면민들은 자발적으로 도끼를 들고 나와 밤나무를 모두 베어 버렸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배 째라?'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율촌을 찾은 이유는 이 작은 도시(도시라고 할 것도 없지만), 군청 소재지가 아닌 시골 면단위 행정구역에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가 4개나 있기 때문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재도 찾아보고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한적한 소도시를 여유 있게 걸어보고 싶다.
먼저 율촌역으로 찾아간다. 순천 쪽에서 율촌역 표지판을 보고 들어서니 주민자치센터가 있고, 커다란 시립도서관이 있다. 면 규모에 비해 큰 도서관을 가졌다. 길이 끝나는 곳에 광장이 있고 단층 건물의 율촌역이 보인다. 간이역 빛바랜 녹색 지붕과 하얀 건물이 옛날의 기억 속으로 파고든다.
기차가 처음 다녔을 때에는 넓은 광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붐볐을 역사 앞에 주차를 하고 역으로 향한다. 역사 처마에 율촌역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무겁게 느껴진다. 역사를 구경하려고 문을 잡아당기니 문이 닫혔다. 창문도 합판으로 봉해서 내부를 볼 수도 없다. 역은 폐쇄됐다.
얼마 전 전라선 복선화 사업으로 새로운 철도가 놓이더니 기차가 더 이상 다니지 않은 역이 되었다. 옆으로 돌아 들어가는 샛길이 있다. 역내로 들어가니 철길 건널목에서 가져온 멈춤 경고등이 역사 앞에 널려 있고, 레일은 포클레인에 의해 하나씩 뜯겨지고 있다. 1922년부터 철길이 놓였으니 88년 동안 기차가 다녔던 철길인데…. 마음이 아프다. 등록문화재? 역사 현관에 등록문화재라는 밤색 문패마저 없었으면 시원하게 밀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율촌역은 1930년 12월 25일 영업 개시하였다. 율촌역이 지나가는 곳은 익산에서 여수까지 이어진 전라선이다. 전라선의 완전한 개통은 1936년 12월 16일이나 1922년 7월 광주에서 여수 간에 개통된 당시의 광주선이 운행되고 있었으며, 순천까지 전라선 구간이 완공됨으로 인해 여수까지 연결됐다.
역사의 왼쪽에 대합실이 배치되고 중앙부에는 역무실이 있으며, 보관 창고가 돌출된 형태로 만나게 되어 'ㄴ'자형 평면구조다. 주요 목구조는 대부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1930년대 초기의 역사로서 근대철도건축사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율촌역은 2010년 8월 31일 마지막으로 기차가 지나갔다.
한적한 소도시 풍경 속으로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면소재지 중심으로 걸어 들어간다. 쇠락한 도시의 정취가 물씬 묻어난다. 한적한 거리,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 미용실, 철물점 등 생활중심의 낮은 상가 건물들. 높은 건물이래야 기껏 3층 정도.
면의 중심은 사거리다. 여기는 북으로는 순천, 남으로는 여수, 동으로는 율촌역, 서로는 여자만으로 향한다. 그러다 보니 순천과 여수에서 시내버스가 수시로 드나든다. 여수 방향으로 길을 잡고 걸어간다. 얼마 전까지 물건이 진열되었을 상가 유리창 안에는 화분만 가득 들었다. 아! 옛날이여.
상가건물들이 끝나는 곳에 막걸리 공장이 있다. 기와지붕을 얹은 주조장은 오랜 전통이 이어져 왔음을 알려준다. 달큰한 막걸리 맛이 그립지만 발길을 돌린다. 길 건너편으로 양철지붕이 숭숭 뚫린 정미소 건물도 있다. 정미소는 더 이상 쌀을 찧지 못하고, 호랑거미가 처마 밑을 지키고 있다.
도심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되돌아간다. 작은 골목이 있어 들어서니 시장이다. 아침 나절 잠깐 동안만 채소를 파는 장이 열린단다. 장은 끝나 썰렁하다. '어디서 왔냐?'며 열심히 설명을 해주시는 할머니는 너무나 환하게 웃으신다.
초기교회에서 최신 교회건물까지 교회건축사를 볼 수 있는 곳율촌에 있는 또 하나의 등록문화재인 장천교회를 찾아간다. 우체국을 지나 도로를 따라간다. 오르막길쯤 하늘 아래 세 개의 첨탑이 섰다. 작은 첨탑, 뾰족한 첨탑, 현대식으로 건축된 웅장한 첨탑. 장천교회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장천어린이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돌로 된 건물이다. 작고 아담하지만 옛 건물에서 풍겨 나오는 오랜 연륜이 배어 있다. 처마 아래 기능을 다한 작은 종도 걸렸다. 계단을 올라서니 내부는 어린이 집으로 개조가 되었다.
장천교회는 1905년 10월에 전라남도 동부지방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교회다. 지금의 교회건물은 1924년에 건립한 석조건축물이다. 건물은 지상2층으로 화강석 벽체에 목조 트러스로 지붕틀을 구성한 전형적인 교회 건축양식이다.
그 옆 교회건물은 1971년에 새로 신축한 건물이다. 내부는 행사장이나 식당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새 건물은 2005년에 지었다. 교회 건물이 세 개나 있는 장천교회를 빙빙 돌다 나온다. 달콤한 금목서 향기가 코 끝에서 긴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