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음력 9월)만 되면 늘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무개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어온 도영이 할아버지도 멀쩡하던 사람이 까마귀 고기라도 먹은 것처럼 거의 습관적으로 아내의 생일(음력 9월 5일)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어영부영 지나가는 나쁜 남편, 불량한 남편이 된 지 이미 오래다.
그러다 보니 이런 나의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한 손아래 누이동생이나 남동생, 그리고 더러는 처제들이 아내의 생일 며칠 전 귀띔을 해줘 그동안 간신히 아내를 크게 실망시키지 않고 나름대로 체면 유지를 해왔다. 그런데 근래 들어 무슨 일인지 동생들도 처제들도 일체 아내의 생일을 귀띔해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동생들로부터 인지도가 많이 빛바랜 사람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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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의 58회 생일을 축하 합니다. 사는게 뭔지 어쩌다 아내의 생일을 새까맣게 잊어 버리고 작은 아들 회사 사장님께서 보내주신 꽃다발과 케이크로 아내의 58회 생일 축하를 보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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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도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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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니 올해도 또 아내의 생일(2010.10.12)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날 수밖에…. 그런데 아내는 며칠 있으면 장인, 장모님 생신인데 이제 두 분도 연세가 있어 거동도 많이 불편하고 건강도 별로 안 좋으니 아무리 바빠도 당신이 큰 사위로 꼭 장인, 장모님 생신날 참석해 두 분과 식사라도 함께 해야 한다고 심지어 본인 생일날 아침까지 이야기 했다.
'중이 제머리 못 깎는' 아내의 눈치를 알아차리지 못한 나는 혼자 속으로 '아니 장인, 장모님 생신에 참석하면 되지 뭘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하는 거야, 일면에선 이젠 나도 노인인데'라고 생각하며 아내가 유난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친정 부모님 생신을 챙긴다고 느꼈다. 차마 아내에겐 대놓고 말은 하지 못하고 나 혼자 구시렁거리기까지 하면서…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장인, 장모님 생신이 하필이면 아내의 생일과 겹쳐 10월엔 (아내, 장인, 장모님) 생신이 3건이 몰려 힘들겠구나 생각하며 며칠 전까지 분명히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일 저녁 아내로부터 "여보 작은 아들 회사 사장님께서 내 생일이라고 커다란 꽃바구니와 함께 케이크를 보냈다"는 전화를 받았고 생각지도 않게 아내로부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난 마치 누구에게 둔탁한 몽둥이로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멍해지며 아무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번번이 아내 생일을 까먹는 나...올해에도 아내 생일을 놓쳤다
아뿔사! 기어코 올해도 또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말았구나 아이고 이 닭대가리, 돌대가리, 헛 똑똑이…. 내가 이러고도 36년 결혼 생활을 함께 한 남편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내가 나를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런 형편없는 남편을 군소리 없이 믿고 살아온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며 부끄럽기 짝이 없어졌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뒤늦게 후회한다고 이미 떠난 버스가 되돌아올 리 만무한데 아무리 손 흔들며 사정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아내는 이런 '불량 남편'의 생일 때만 되면 한 달여 전부터 친지들과 함께 식사 계획을 짜고 선물을 준비하고 온 정성을 다 쏟아 나의 생일을 성심 성의껏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명색이 인생의 영원한 반려자이며 남편이란 위인이 어영부영 40여 년이란 세월을 함께 살아온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번번이 잊어버리다니…. 내가 나를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도무지 용서가 쉽지 않고 심지어 상습범이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래 여보 맞아요. 나는 상습범입니다. 절대 용서하지 말아요.
그런데도 이 바보 남편은 밥 귀신이 붙었는지 삼시 세 끼 꼬박꼬박 아내가 밥을 지어 차려줘야 먹는 식충이가 되어 아내의 생일날에도 미역국도 끓이지 못했다. 거기에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남편의 점심상을 차려주며 "여보 오늘은 당신 혼자 식사해요. 나는 누구와 약속이 있어 나갔다 올 테니"하며 집을 나간 아내를 두고 '무정한 사람 같으니 하늘 같은 남편이 식사하는데 친구와 약속을 위해 나가 버리다니' 하고 조금은 섭섭하다는 생각을 했다. 또 혼자 '요즘 여편네들 정말 너무 한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 아이고 돌대가리 이놈의 도영 할아버지가 아무래도 갈 때가 됐는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단 소리밖에 더 할 말이 없다. 그런데도 아내는 야속하다는 말 한마디 않고 작은 아들이 퇴근한 저녁에 나에게 전화하여 "여보 도영이 할아버지, 작은 아들 회사 사장님께서 보내주신 꽃다발과 케이크 잘라야 하는데 잠깐 집에 와서 사진이라도 찍어 주지 않을래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허둥지둥 샴페인 한 병을 준비해 집에 도착했다.
작은 아들과 손자 아이가 케이크에 점화하고 손자 아이의 '할머니 생신 축하' 노래에 맞춰 네 식구가 아내의 58번째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아내의 생일은 허무하게 끝났다. 케이크를 나눠 먹으면서 아내가 웃으며 "여보 당신 올해도 또 내 생일 잊어버렸지요?" 하는데 더는 아들과 손자 아이 앞에 부끄러워 자리를 함께 할 면목이 없어 서둘러 사무실에 내려와 반성을 했다.
이렇게 멋대가리 없고 눈치 없는 남편을 자신의 평생의 반려자로 믿고 의지하며 두 아들 낳아 뒤치다꺼리 다 해 키우고, 그것도 모자라 손자 아이까지 맡아 키우며 자신을 희생한 아내 도영이 할머니에게 너무 죄송하고 면목없고 미안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다. 아무래도 오늘은 점심 시간에 아내와 단둘이 외식이라도 하며 나의 무지와 불성실함을 사과하고 아내에게 작은 봉투 금일봉이라도 전해야 할 것 같다. 여보, 도영이 할머니 미안합니다. 당신의 건강을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