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숨결이 배어있는 곳은 아름답다. 문학의 향기가 배어있는 곳은 그 문학가의 발자취와 역사와 함께 하기에 더욱 커가는 현재를 만들어 준다.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구상 문학관은 우리에게 익숙한 '초토의 시'를 쓴 구상 시인의 시 정신과 얼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시인 구상은 전통사상, 선불교적 명상, 노장사상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정신세계를 수용해 인간존재와 우주의 의미를 탐구하는 구도적(求導的) 경향이 짙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구상 시인은 프랑스가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이며, 노벨상 후보에 두 번 오른 시인이다. 일명 '강의 시인'이라 불리는 구상은 경북 칠곡군 왜관에 22년 간 살며 낙동강을 보면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가 타계하기 몇 년 전부터 건립이 추진된 구상 문학관은 칠곡군과 여러 문인들이 힘을 합쳐 완성되었다. 현재 구상문학관에는 시인 구상과 관련된 시와 그를 기억하는 지인들의 물건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모임을 위한 공간들이 함께 마련되어 있다.
구상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함경남도 원산의 베네딕도 수녀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그곳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울산부사, 큰아버지들은 창녕 현감과 현풍 군수, 아버지도 궁내부 주사를 지내 대대로 관리 집안이었다. 외가는 전통적으로 천주교 집안이어서 구상 시인은 어려서부터 천주교에 귀의했다.
어머니가 마흔 넷일 때 낳은 늦둥이 구상은 매우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소학교 입학 시 와이셔츠와 검정 양복 바지, 란도셀(소학교 학생들이 메고 다니던 가방)을 가로 질러 매고 학교에 갔다고 한다. 그러자 아이들이 '우체부 납시오'하며 놀리는 바람에 그 다음 날에는 한복을 잘 갖춰입고 그 위에 두루마기를 덧입고 갔더니 이번에는 '꼬마 신랑 같다'고 놀려댔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신학교를 중퇴하고 일반학교에 전학을 갔지만 그곳에서 퇴학을 당하고 만다. 문학을 한다며 일제에 불평불만을 하는 조선인으로 평가되어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평가도 내릴 수 있다.
이후 그는 노동판을 전전하기도 하고 야학교사 생활도 하다가 밀항을 통해 일본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연필공장 노동자 등을 거쳐 주위의 권유로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기독교, 천주교, 불교등 여러 종교의 철학에 관해 배우고 종교가 인간의 삶에 끼치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 과정에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평등을 가슴깊이 새기며, 남들에게는 자신을 '소농'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여 1941년 '북선매일'의 신문기자가가 되고, 시 작업도 계속한다. 1946년 필화사건에 휘말려 반사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월남을 결심한다. 월남 이후 연합신문사에 근무하며 6.25전쟁시에는 '승리일보'라는 국방부 기관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그는 남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10여편이 넘는 시집과 수상집, 수필집 등을 펴냈다. 그의 책은 불어,독어, 스웨덴어로 번역되어 외국에서 더욱 유명한 문인이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구상은 그의 아내와 극진한 사이였다고 한다. 구상 시인이 결혼을 하기전 폐병으로 몸이 많이 안 좋았다고 한다. 의사였던 그의 아내가 극진한 간호를 하는 모습은 구도자적 시의 원형으로 작용하여 구상의 시 속에 녹아있다. 그리고 아내를 위해 칠곡군 왜관읍에 순심의원이라는 병원을 지었던 그 터에 이제는 구상 문학관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구상 시인은 매우 미남이다. 키가 크고 선해 보이는 눈매를 가진 그는 말수가 적고 항상 겸손하며, 나서서 이야기하기보다 듣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살아 생전 세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위의 둘은 자신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막내인 소설가 구자명 씨가 남아있다.
구상문학관 뒤편으로 가면 관수재라는 이름의 작은 별채가 있다. 이곳은 구상 시인이 그의 예술가 친구들과 인생과 삶에 대해 논하던 곳이다. 특히 친했던 사람으로는 화가 이중섭이 있는데, 그는 구상 시인의 책 표지화를 그려주기도 하는 등 각별했다고 한다.
시를 통해 구도의 삶을 이야기 한 시인 구상은 지병인 폐질환 악화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북한에서 반동적 부르주아 시인이라 비판 받고, 월남 후 65년에 '수치'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려고 하자 남한 당국에 의해 공연 보류가 내려지게 된다.
그는 정치적인 곤경에 처한 문인들의 무죄를 증언했던 사람, 여러 차례 정계 입문 제의를 거절한 사람, 화가 이중섭의 후견인, 사형수 한 명을 양아들로 삼아 그의 구명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한번 인연을 맺으면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진리로 사람을 대했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낙동강에 나가서 낚시하는 것을 즐겼던 구상은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시심을 낚는 것 같다'고 주변 사람들이 평가 할 만큼 낙동강과 관련된 시를 많이 발표했다. 이제 그의 문학관 한쪽으로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는 우리에게 그 고고한 시심을 더욱 기억하게 할 것이다.
그는 구상 문학관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살아생전 문인들이 가져다 놓은 일상품을 통해 떠난 시인을 고스란히 기억할 수 있다. 문학관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의 전경을 보며 구상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구상 문학관에서는 매년 초에 문학수강생을 모집한다. 시와 수필 두 파트로 주 1회 수업을 약 1년간 진행하며, 현재 이 수업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회원이 다수 있다. 수업은 무료이며 등단 시인과 수필가의 지도 하에 작품을 지도받게 된다.
매년 10월 경에는 구상 문학제가 개최되어 칠곡군에 터전을 잡고 활동했던 시인 구상을 다시 기억하게 하고, 지역 청소년에게는 글을 쓰고 사유하는 것이 인생의 귀한 자산임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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