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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우리가 숱한 과오와 실패를 겪는  순간에도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되어 현재를 , 앞으로의 삶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 것이 역사의 근본 원리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난 날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나아갈 바를 정립하고, 선인들의 발자취 속에서 책이 가르쳐 주지 못한 배움을 얻게 된다.

이제 지역문화의 화두가 된 관광을 역사와 연계하여 생활속에서 역사의 현장을 접하는 것이 일상화 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구 지역의  대표 문인 중 한 분인 이상화 선생이 기거했던 집과 그 인근의 약전 골목을 중심으로 대구의 근현대사 골목을 따라가 본다.... 기자 말

대구 문화의 발자취, 이상화 고택

대구 지하철 반월당역을 나오면 특이한 이름의 거리가 있다. 일명 '뽕나무 골목'. 하지만 이곳엔 뽕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과거 일제 시대에는 그 이름대로 무수한 뽕나무가 우거져 있던 곳이었고,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이 골목에는 이상화 시인 외에 독립운동가 이상정, 국채보상운동주창자 서상돈 선생의 고택 등이 있어서 대구의 근현대사 역사공간으로 집중 조명 받고 있다.

이상화 고택 .
이상화 고택. ⓒ 조을영

민족시인 이상화가 1939년에서 1943년까지 살았던 이 집은 시조 '기미년'과 수필 '나의 어머니', 시 '서러운 해조' 등의 작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있었지만 1999년부터 시민과 이상화 고택 보존위원회에서 100만인 서명운동을 개최하는 등 끈질긴 노력을 기울여서 1940년대 당시 모습대로 복원, 무료 개방하여 지역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대구시가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을 설치 완료했다. 민과 관이 연합하여 향토 문인의 발자취를 쓸고 닦아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데에 의미가 깊다.

이상화 고택  .
이상화 고택 . ⓒ 조을영

문화해설사들은 이상화 고택에 가기 전에 그의 시 몇 수 정도는 외워 가는 것이 좋은 학습 방법이라고 권장하고 있다. 학창 시절 암기 형식의 시 분석 공부를 배제하고, 공간과 교감하며 시인의 시를 음미하는 참 공부를 해보라는 뜻이다. 집 내부는 보수 공사로 옛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매우 경건하고 차분한 기운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상화 시인은 온갖 문예사조가 탁류처럼 휩쓸던 20년대에 모국의 언어를 지킨 의지의 시인이다. 많은 문인들이 훼절한 가운데서도 외세에 굴하지 않고 자기를 지켜낸 몇 안 되는 문학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는 한결 더 돋보일 수밖에 없다.

1933년 교남학교(지금의 대구 대륜고등학교)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며 조선어와 영어, 작문을 가르쳤다. 이 학교의 교가를 작사한 그의 일화는 지금도 이 학교 입학식날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상화 고택 .
이상화 고택. ⓒ 조을영

이상화 고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작은 가로등 장식이 있다. 감지 센서가 달려 있어서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가면 이상화 시인의 시가 낭송되어져 나온다. 상화는 60여 편이 넘는 시와 소설, 평론, 번역 소설까지 남겼지만 그간 우리에게 익숙한 시는 두어 편 정도 밖에 없기에 지역 문인들도 매우 아쉬워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이 골목을 수없이 지나며 이상화 시인의 다양한 작품들을 일상에서 접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가로등의 의도이다.

이상화 고택 내부 .
이상화 고택 내부. ⓒ 조을영

시간과 역사가 숨 쉬는 약전골목

이상화 고택을 벗어나면 대구의 유명한 한약도매상 거리인 약전 골목이 펼쳐진다. 조선시대부터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지역 문화 활성화를 위해서 시에서 각종 표지판과 시설물을 갖추면서 새 단장을 했다.

역사가 오래된 골목인 만큼 간혹 일제 시대 건물도 눈에 들어온다. 1970년대에 대구에서 대학 강의를 하던 영국인 노교수가 최근 다시 대구를 방문해서는, 사라져가는 한옥들과 옛 문화를 안타까워하면서 약전 골목을 잘 정비해 줄 것을 시청에 당부했다고 한다.

지난 시절,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개발로 일관하며 살아왔다. 그래선지 그의 눈에 비친 대구는 소박하고 귀한 문화재산을 함부로 헐어내는 기이한 나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의 나라 영국에서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시간과 먼지가 앉은 만큼의 문화유산은 관광자원으로 훌륭히 기능하고 교육적인 효과까지도 가지는 데 비해, 한국은 과거 유산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안타까움이었다.

한약재 .
한약재. ⓒ 조을영

대구 약령시는 1658년 경상도 관찰사 임의백이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경상감영 안에 약재 시장을 개설한 것이 그 출발이다. 이후 1908년 경상 감영 관찰사 박중양이 현 위치(약전골목)로 시장을 이전했다.

약전 골목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골목 곳곳에서 과거 역사를 볼 수 있다. 특히 일제 시대 때 지어진 건물도 만날 수 있는데, 한때는 이런 건축물이 치욕스럽다는 이유로 일제 시대 건물을 허무는 것에 찬성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대구의 한일극장 같은 일제식 건물은 15년쯤 전에 헐리고 일괄적이고 똑같은 모양의 빌딩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젠 과거 아픈 역사의 한 부분까지도 수용하고 교육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바뀌고 있습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대구 약전 골목은 대구의 과거 현재를 함께 볼 수 있는 귀한 자산인 셈이다.

약전 골목의 일제 시대 건물 .
약전 골목의 일제 시대 건물. ⓒ 조을영

약령문 .
약령문. ⓒ 조을영

최근 조성한 한의약문화관 앞에는 약탕기를 모티브로 한 분수와 유려한 곡선을 형상화한 냇물을 만들었다. 한약 관련 행사가 있을 때는 그 냇물에 한약 우린 물을 넣고 족욕을 하는 행사를 통해 건강과 역사를 위해 존재하는 대구 약전 골목의 이미지를 이어가고 있다.

한의약문화관 앞 분수 .
한의약문화관 앞 분수. ⓒ 조을영

지난 시절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개발의 가속화가 가져온 폐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한 더 이상 물질문명과 개발의 논리가 정신문화와 자존의 논리를 짓밟지 못하도록 공고한 연대의 힘을 결집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도시 개발의 쇠바퀴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현장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의 뿌리와 정신적 유산 또한 매장되어 버린다는 사실도 실감했다.

문화의 세기로 일컬어지는 21세기는 효율성과 개발의 논리보다 문화적 자산이 더 큰 생산성을 발휘하는 시대이다. 자연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재산이듯이, 문화 보존 운동은 자손만대를 먹여 살릴 문화적인 식량을 마련하는 일이며, 이러한 이상과 목표를 향해 전 국민의 열성과 지역민의 이해와 동참을 바탕으로 대구시가 고난의 역사를 헤쳐 가는 선도적인 도시로서 우뚝 서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든다.


#대구약전골목#이상화 고택#뽕나무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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