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월 바람이 벌써부터 찹니다. 추운 날씨에도 막사에서 생활하며 인간다운 대접을 받길 원하는 이들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들의 비정규직 투쟁이며, 두 번째는 현대차 하청업체인 동희오토 노동자들의 투쟁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홍대 두리반에서 철거 반대 투쟁을 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세 가지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기자 말

때아닌 10월 한파가 몰아쳤다. 기상청 관계자는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아침 기온이 한 자리 수를 기록하던 26일 기자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농성장을 찾았다. 이날은 기륭전자 농성 1836일째, 단식 농성 14일, 크레인 농성 12일째 되던 날이었다.

기륭전자 노조가 싸웠던 6년 동안 공장은 허물어졌고, 공장 주인도 바뀌었다. 최동열 사장이 버리고 간 공장 부지의 새 주인이 될 코츠디엔디는 아파트형 공장을 짓기 위해 기륭전자 농성장으로 포클레인을 보냈다.

포클레인이 농성장에 들이닥친 지난 15일, 유흥희 조합원이 바퀴 앞에 드러누웠고, 송경동 시인이 포클레인 위에 올라가 전깃줄 하나에 몸을 맡긴 채 버텼다. 결국 주인 없는 포클레인은 보령슈퍼 앞의 새로운 산업예술품으로 바뀌었다.

전선줄에 몸 맡긴 시인, 꽃상여 매단 포클레인

꽃상여를 동여맨 포클레인.
▲ 농성장 앞 포클레인 꽃상여를 동여맨 포클레인.
ⓒ 기륭전자 노조까페

관련사진보기


기륭전자 구 사옥 옆에 있는 비젼파크(유한) 공장 노동자들이 하나 둘씩 퇴근할 무렵인 오후 7시쯤 1836회째 촛불문화제가 시작했다. 비젼파크 공장 경비실 앞에 스무 명 안팎의 조합원과 촛불 시민들이 앉았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탄다던 노동가수 김성만은 목장갑을 낀 채 노래를 불렀다.

'기륭전자분회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 함께 맞는 비'로 의 회원인 오진우씨는 "오늘 아님 내일쯤 경찰들이 들이닥칠 것 같은데, 날이 추워져 사람들이 안 와 걱정이다"고 하였다. 문화제를 마치고, 늦은 밤 컨테이너 박스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문재훈 서울 남부 노동상담센터 소장은 농성장 앞 포클레인에 대한 일화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문 소장은 "저 포클레인이 들어오던 날, 윤종희 조합원이 드러눕고 문화예술가들이 와서 작업을 시작했어. 설치미술가들이 와서 대여섯 시간 동안 용머리와 조등을 매달아 꽃상여를 만들어 붙이니 포클레인이 확 달라지지 뭐야. 예술가들은 참 신기한 재주가 있어"라고 말했다.

문 소장은 막걸리를 한 잔 쭉 마시더니 웃으며 "곧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의 6년을 담은 사진집이 나와. 송경동 시인이 사진에 붙일 글을 쓰고, 정택용 진보정치 사진기자가 사진을 찍었지. 근데 편집 작업을 저 포클레인 위에서 했어. 송 시인이 포클레인 위에서 안 내려오고 있으니 별 수 있나. 위에서 작업해야지"라고 했다. 농성장을 없애려고 보낸 포클레인이 되레 농성장을 빛내는 형국이었다. 포클레인은 농성장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었다.


10년만의 10월 한파, 기륭전자 막사엔 서리가 내렸다

10월 한파가 몰아친 날. 기륭전자 농성장 막사 안은 무척 추웠다.
▲ 기륭전자 막사. 10월 한파가 몰아친 날. 기륭전자 농성장 막사 안은 무척 추웠다.
ⓒ 기륭전자 노조까페

관련사진보기


막사는 잠을 자기엔 무척 추웠다. 이불이 미처 다 가리지 못한 콧등에 서리가 앉았고, 양말을 두 개씩 신고 잤는데도 발끝이 시렸다. 이따금씩 추위에 잠을 깼고, 이따금씩 막사 앞을 지나가는 차 소리를 진압 하러 온 경찰차 소리로 착각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다른 이들은 추운 막사 안에서도 잘 자는 듯했다. 문득 그들이 여섯 번의 혹독한 겨울을 이겨냈던 것이 생각났다. 포클레인 위 텐트에서 잠을 잔 김소연 분회장이 "잘 때 춥지는 않았느냐?"고 물었다.

27일 아침. 김소연 분회장과 조합원이 아침 출근 집회를 참석하고 있다.
▲ 기륭전자 아침 집회 27일 아침. 김소연 분회장과 조합원이 아침 출근 집회를 참석하고 있다.
ⓒ 기륭전자

관련사진보기


농성장 옥상에서 단식 중인 조합원.
▲ 기륭전자 아침 집회 농성장 옥상에서 단식 중인 조합원.
ⓒ 기륭전자

관련사진보기


27일 아침에도 기온은 한 자리 수였다. 문 소장은 "이 정도는 추위도 아니여. 투쟁하는 사람들은 여름, 겨울이 제일 고생이여"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침 출근 집회에서 황철우 기륭공대위 집행위원장은 26일 포클레인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던 송경동 시인의 실족 사고 소식을 전했다. 송경동 시인의  발뒤꿈치 뼈가 으스러져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 하였다.

당장 오늘 내일 경찰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합원들은 병원에 있는 송경동 시인의 부상을 안타까워 했으며, 병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쳐 송 시인을 연행할까봐 걱정했다.

"난 노동운동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요"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가한 때에 이인섭, 박행란 조합원과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이인섭 조합원은 "회사 다닐 적에 가끔씩 TV에서 파업 뉴스 같은 걸 보면 '저런 걸 왜 하나' 생각했어. 비정규직 문제는 알지도 못 했지.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야 비정규직의 문제를 알게 됐어. 노동 운동은 전에 해본 적도 없어"라고 말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을 6년이나 할 줄 알았냐'는 질문에 이 조합원은 "좀만 참고 하자 한 것이 벌써 6년이 됐어. 최동열 사장 생각만 하면 내가...  이제는 기륭이 망하거나 우리를 받아주든가 둘 중에 하나야"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박행란 조합원은 "2008년 <작은 책>에서 인터뷰를 했을 적에만 해도 해고당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났었어. 근데 이제는 기억조차 안 난다"고 말했다. 기륭전자 복직 투쟁 6년이 그녀를 변화시켰다. 2004년에 입사한 박행란 조합원 역시 노동 운동과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녀 역시 6년씩이나 싸우게 될 줄 몰랐다고 한다. 박 조합원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2년 정도 하면 끝날 거라 생각했어. 그게 6년이 지났어. 애가 둘 있는데 애들한테 미안하지"라고 말한다. 그녀는 최동열 사장에 대한 신뢰가 많이 깨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선 복직하고 나면 신뢰는 다시 쌓아갈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만난 어느 누구도 이 싸움을 6년씩 계속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최웅 민주노동당 노동부장은 '이번이 마지막 투쟁 될 것 같냐'는 질문에 "이제 그만 해야지… 6년이나 됐는데… 정말 지독하게 열심히들 하셨어…"라고 말했다.

2005년 처음 농성을 시작했을 때 이인섭 조합원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지금은 그녀는 마흔셋이다. 삼십대 후반을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에 보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박행란 조합원의 자녀는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다고 했다.

이번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이 그들의 마지막 투쟁이 될 것 같냐'는 기자의 질문에 유흥희 조합원은 "6년 전에도 마지막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마지막 투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며 질문을 일축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전 날 노동가수 김성만씨가 문화제에서 불렀던 "굵어야 할 것이 있다"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다.

"굵어야한다 / 꿈적도 않을 투쟁이 굵어야한다 / 길이 멀수록 바람 셀수록 / 동지여 굵어야한다."


태그:#기륭전자, #비정규직, #비정규직 투쟁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