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08년 8월 31일 유무상통(有無相通)마을의 미리내실버타운(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성당에서 주일교중미사를 지내며 방구들장 신부님은 강론 시간에 신자 노인들과 가족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 신자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이가 많을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이가 많을까요?"

아무도 선뜻 대답을 못하자, "예수님을 믿는 이는 99%요, 따르는 이는 1%도 안 될 거라고  말하면 틀린 말일까요?"라고 재차 묻고는 이런 얘기를 했다.

"예수님이 언제 자신을 믿으라고 하셨나, 따르라고 하셨지! 오늘 신부인 제게도 하느님 성령께서 임하시어 깨우침을 주신 것 같습니다. 따르고 실천하는 이는 별로 없고,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무임승차하여 구원받겠다는 도둑놈 심보만 갖고 사는 이가 99% 이상이니, 장로 대통령부터 목사와 신부에 이르기까지 다 그 모양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자(信者)'란 말 그만 씁시다. 신자란 말은 너무 흔해서 그만큼 신용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자란 말 그만 쓰고 좇을 준(遵)자를 가져다가 '준자(遵者)'라는 말을 씁시다. 준자란 '따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준주성범(遵主聖範)'이란 말 아시죠? 그 준주성범의 준자입니다. 어떻습니까? 준자, 준자. 미인 이름 같기도 하고, 왠지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우리 다함께 신자라는 말 대신 준자라는 말을 사용합시다. 예수님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다시 말해 '준자'라는 말의 뜻을 깨닫고 실행한다는 뜻으로 이제부터는 준자라는 말을 사용합시다.

이름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크리스천들은, 적어도 '깨어난' 이들은 이름부터 개명을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신자라는 말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 준자라는 말을 쓰면서 준자로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부터 주님을 믿기만 하는 신자가 아닌, 주님을 따르는 준자가 됩시다!"

나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다. 나는 과연 신자일까, 준자일까? 신자라는 이름에만 절어 있는 사람은 아닐까? 그래서 준자라는 이름에서 생소하고 어색한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닐까? 이 의문은 오늘도 내 가슴에 무겁게 얹어져 있다. 

바닷가를 즐겨 찾으시건만

유람선 운전실의 사제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 ‘유무상통마을’ 방구들장 신부님의 2007년 6월의 모습. ‘미리내실버타운’ 노인들을 모시고 태안의 안흥항으로 나들이를 오셨을 때 유람선을 타고 직접 운전하시는 모습을 내가 촬영했다. 방구들장 신부님은 최근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유람선 운전실의 사제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 ‘유무상통마을’ 방구들장 신부님의 2007년 6월의 모습. ‘미리내실버타운’ 노인들을 모시고 태안의 안흥항으로 나들이를 오셨을 때 유람선을 타고 직접 운전하시는 모습을 내가 촬영했다. 방구들장 신부님은 최근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 지요하

방구들장 신부님은 가끔 필자가 사는 태안의 바닷가를 찾으신다. 안흥이나 만리포에서 미리내실버타운 노인들과 함께 오신 신부님과 식사를 한 적이 여러 번이다. 이태 전 태안 앞바다가 기름으로 덮였을 때도 신부님은 두 번이나 냄새 나는 바다를 찾아 둘러보고 기름제거작업을 하는 자원봉사자들에게 격려금을 주시고 갔다.

나는 방 신부님이 해물 음식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2007년 6월 태안읍의 한 바닷가에서 가진 천주교 신자 네티즌들의 모임 자리에서 알았다. 아니, 알았다기보다는 신부님이 사양이나 절제를 하시는 것으로 짐작했다. 내가 애써 장만한 붕장어를 양념에 묻혀 굽기도 하고 소금을 발라 굽기도 했는데, 그 맛있는 붕장어 구이를 통 잡숫지 않아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 뒤로 방 신부님의 그런 모습을 거의 잊고 지냈는데, 해가 바뀌고 다시 뵙게 된 자리에서 해물은 일체 드시지 않고 별도로 된장찌개를 시켜 식사를 하시는 신부님을 보자니 냉큼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 중에는 생선회를 먹지 못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익힌 해물은 즐겨 먹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방 신부님은 그 무엇이든 해물이라는 것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은 본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해물 음식을 권하고, 일행들이 해물 음식을 맛있게 자시는 모습을 둘러보며 즐거운 웃음을 짓는다.  
         
나는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신부님이 왜 해물 음식을 못 드시는지, 혹 의지로 안 드시는 건 아닌지, 참으로 궁금한 마음이었다. 나는 신부님께 물었다. 생선회를 드시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생선구이까지도, 조갯국 등 패류 따위도 일체 입에 대지 않으시니, 혹 무슨 연유라도 있는 것 아니냐고. 

신부님은 꼭 감추고 살아야 할 비밀 얘기가 아니어서인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해 주셨다. 9년 전인가 10년 전의 사제 피정 때, 자신이 가장 즐기는 음식 한 가지를 평생 동안 먹지 않고 살기로, 그것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굳게 결심하게 된 얘기를 들려주셨다.

그때까지는 가장 즐기는 음식이 해물 요리였다고 했다. 생선회는 물론이고, 해물 음식을 다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해물을, 한 가지 요리도 아닌 해물 음식 전체를 평생 동안 먹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봉헌'을 지금까지 굳게 잘 실행해오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신부님의 그 말씀을 들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요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하는 음식들이니, 나도 이참에 평생 동안 생선과 패류를 일체 먹지 않고 살기로 하느님과 약속을 할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방 신부님에게서 오는 어떤 경이감에 계속적으로 압도되는 기분을 삼키며 별 맛 없이 식사를 했다.     

개명과 본적지 변경

방구들장 신부님의 원래 호적 이름은 '방상복'이다. 명함에 '김방상복'이라는 이름을 새겨 사용하기도 했다. 어머니 성도 가져오되 발음의 편리를 위해 어머니 성을 아버지 성 앞에 놓으셨던 것 같다. 세례명은 '대건 안드레아'인데, 태중교우이신 데다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984년 성인품에 오르기 훨씬 전에 사제 서품을 받으셨을 테니, 방 신부님 스스로 세례명을 바꾸신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방 신부님은 최근 방상복이라는 호적 이름도 '방구들장'으로 바꾸었다. 한국의 재래식 온돌방에는 구들장이 있다. 구들장의 온기는 구들장 위에 누워본 사람만이 안다. 온돌방 구들장의 온기만큼 사람의 등을 따뜻하고 안온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온돌방 구들장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방 신부님은 당신 스스로 구들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같다. 사람들의 마음을 안온하게 하고 등을 따뜻하게 해주는 구들장 역할을 하며 살기로 다짐하고 방씨 성과 잘 어울리는 구들장으로 개명을 하셨다.

방구들장 신부님은 올해 3월 26일 안중근 토마스 장군 순국 100주년을 맞아 매우 뜻 깊은 행사를 시행했다. 유무상통마을 미리내실버타운 마당에 안중근 장군 동상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거행하면서 '안중근장학재단'을 출범시킨 일이다.

신부님은 정의와 민족정기가 실종되고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개탄한다. 친일세력이 지금도 큰 힘으로 발호하며 몰염치와 파렴치와 후안무치가 횡행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안중근 장군의 기상과 민족정기가 계승되는 시대를 갈망하고 기원하는 뜻으로 안중근 토마스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거행하면서 안중근 장군의 정기를 계승할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장학금 첫 수여식도 치른 것이다.

이렇게 올해 들어 뜻 깊은 두 가지 큰일을 실행한 방 신부님은 최근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을 했다. 자신의 본적지를 전라남도 장성으로 옮긴 일이다. 방 신부님은 경기도 안성 출신이다. 그런 분이 왜 굳이 본적지를 전남으로 옮긴 것일까?

지역감정, 지역차별, 지역패권주의 등등이 범람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고 살고 있다. 그 몰이성적인 현상 속에서 호남인들이 받아왔고 받고 있는 오해와 차별은 참으로 심대하다. 그것의 구체적 실상을 듣고 확인하면서 방 신부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 속에서 방 신부님은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도 떠올렸다. 로마의 지배 하에서 유다의 갈릴래아 지방은 가장 천대받는 곳이었다. 유다인들의 지역 편견 속에서 더욱 힘들고 고초가 컸던 갈릴래아 나자렛의 예수가 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하여 방구들장 신부님은 전라남도 장성으로 본적지를 옮기고 '전남 출신' 사람이 되어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방구들장 신부님은 남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일들을 실행하고, 민족정기를 갈망하며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현실참여적인 일들에 적극 동참하지만, 신부님의 얼굴은 한없이 온화하여 순량함을 느끼게 한다. 신부님 곁에 서면 절로 평화로움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저렇게 온화하고 평안한 얼굴일 수 있을까?

예수님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상황에 따라서는 과격한 발언도 아끼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성전의 장사치들을 몰아낼 때처럼 불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나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어린아이들을 안고 계시는 평화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방구들장 신부님의 모습에서 느끼곤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천주교계 월간지 <생활성서> 1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작은 예수#유무상통마을#미리내실버타운#방구들장 신부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