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가 면장이셨다. 6·25 전쟁 때 돌아가셔서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엄마 곁에 누워 외할아버지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학교 가기 싫어했던 어린 딸 등에 업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던 분, 늘 책을 곁에 두고 읽었다던 분, 그래서 많은 걸 알고 있었다던 분,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물어보는 모든 것에 척척 답을 주셨다던 분….
'면장은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된 건, 어린 시절 엄마를 통해서 들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인상 때문이다. 나중에 '알아야 면장을 하지'란 속담도 있다는 걸 알고 난 뒤에 그 생각은 확신처럼 굳어졌다.
이 속담에 쓰인 '면장'은 면면장(免面墻)의 줄임말인 면장(面墻)으로, '면장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면장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선 것같이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견문이 좁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따라서 면면장은 이런 갑갑한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뜻인 것이다. (책 속에서)속담 속 면장이 많은 걸 알고 있던 외할아버지처럼 '면의 책임자'를 가리키는 말로만 알고 있었던 확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틀림없을 거라는 생각이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다른 때보다 더 아팠다.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있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늘 곁에 두고 쓰는 물건일수록 귀한 줄 모르고, 가까이 붙어사는 사람일수록 존재의 소중함을 잊기 쉽다. '우리말'도 그 대표적 예가 될 수 있다. '우리말 달인'보다는 '영어의 달인'이 더 우러러 보이는 세상,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 적당히 섞어 써야 권위가 선다고 여기는 사람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새 상품에 붙은 외국어 이름들….
토속적 우리말보다는 세련된 외국어 이름이 사람들의 주목을 더 많이 받고 상품 판매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국내 시장 뿐 아니라 수출 시장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말 이름보다는 외국어 지은 이름이 훨씬 유리하다고 얘기한다. 과연 그럴까.
천편일률적으로 서구형 이름을 달고 있는 가전제품들에 둘러싸여서도 단연 빛을 발하는 우리말 이름의 가전제품이 있다. 위니아만도에서 만든 김치냉장고 '딤채'다. 워낙 유명한 브랜드라서 많은 사람이 대기업 제품으로 착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중소기업에서 만든 초대박 상품이다. (책 속에서)뿐만 아니다. 김연아가 2009년 4월 고양시에서 열린 아이스쇼에서 입고 나온 한글무늬 티셔츠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물론 김연아의 명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한글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품이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끌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좋은 음식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듯이, 좋은 말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맛이 있다. 사람들의 입맛을 끄는 음식은 식재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조리 솜씨가 빚어낸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은 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오랜 세월 갈고 닦아 숙련된 솜씨가 빚어낸 산물이다.
<우리말 필살기>는 우리말을 사용할 때 알아두면 좋은 이야기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우리말의 원리와 핵심을 '어원, 규칙과 원칙, 한자어 분석, 외래어 표기법, 우리 언어의 습관을 통한 관용적 표현, 한글의 역사' 등의 여섯 가지로 분석해 보여준다.
좀 더 좋은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고, 좀 더 좋은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이들에게 <우리말 필살기>는 좋은 책이다. 늘 곁에 두고 생활하면서 소홀하게만 바라보았던 우리말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깨닫게 해 주고, 쓸모 있는 말과 글을 골라 쓰는 재미까지 덤으로 얻게 해준다.
덧붙이는 글 | 공규택/추수밭/2010.10/13,000원